ORIGINAL FICTION
제120화 — 다른 깃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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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3년 10월.
첫 전후 지역정치협정이 오리슨에서 서명됐다.
이름.
CIVIL CONTINUITY & RECONSTRUCTION CHARTER 시민연속성·재건헌장
연속성위원회가 만든 첫 문서.
법률은 아니었다.
정치적 헌장.
그러나 17개 지역과 여러 기능기관이 전쟁 뒤 어떤 질서를 공유할지 처음으로 한곳에 적었다.
◆서명장에는 깃발이 많았다.
노스리버.
캐스케이드.
오리슨.
하퍼.
켈런은 회사기 대신 주민위원회와 회사 공동표식.
세이블.
브라운필드.
각자 다름.
공통기 하나를 만들자는 제안은 부결됐다.
다리우스가 말했다.
“벌써 국기 만들면 다들 도망갑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헌장 초안은 모든 지역 언어·표기체계로 번역됐다.
법률효과가 있는 계약은 아니어도 사람이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번역 중 ‘sovereignty’와 ‘continuity’가 지역마다 다른 역사적 뉘앙스를 가진다는 문제가 나왔다.
한 번역가는 말했다.
“직역하면 중앙정부 복원처럼 들립니다.”
다른 지역은
“자치 연속성”으로 읽혔다.
결국 용어집을 함께 만들었다.
공통문서의 첫 작업이 단어를 같은 의미로 만드는 일이었다.
헌장 첫 조항.
No participant derives sovereignty over another by virtue of shared reconstruction, security coordination, finance, or infrastructure.
재건.
안보조정.
금융.
인프라.
같이 했다고 누가 누구 위에 서지 않는다.
두 번째.
Common Floor.
세 번째.
무력충돌 금지.
네 번째.
탈퇴.
다섯 번째.
판결상호인정.
여섯 번째.
피난·귀환·잔류.
일곱 번째.
공공기록과 비상권한 종료.
◆헌장에는 경제적 이동권도 일부 들어갔다.
다른 참여지역에서 일한다고 기본의료·법적보호를 잃지 않게.
연금·보험의 완전통합은 못 했다.
대신 Portability 최소기준.
근무기록 이전.
자격 상호인정.
보험 공백 제한.
76화에서 시작한 ‘떠날 수 있는 제도’가 조금 더 구체적 권리가 됐다.
가장 오래 싸운 문장.
시민권.
지역마다 다름.
복수거주.
잠정주민.
기업도시.
피난민.
헌장은 공통 시민권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어느 지역 시민이든 다른 참여지역에 들어갔을 때 최소권리를 잃지 않는다는 조항.
완전한 이동자유도 아님.
영주권도.
그 전에 권리의 바닥부터.
◆첫 지방선거에서 잠정주민 출신 유권자의 투표율은 전체평균보다 조금 높았다.
왜?
아샤가 말했다.
“몇 년 동안 우리가 주민인지 아닌지 계속 싸웠잖아요.”
노아.
“그래서?”
“표 생기면 써야지.”
어떤 사람에게 투표는 평범한 습관.
어떤 사람에게는 ‘여기 사는 사람’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행동이었다.
아샤는 노스리버 지방선거권을 얻었다.
실거주기간 기준 개정.
첫 투표일.
노아가 물었다.
“누구 찍었어요?”
“비밀투표.”
“예전엔 말해준다며.”
“마음 바뀜.”
그녀는 웃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원지역 유권자.
같은 가족.
다른 정치공동체.
그게 가능해졌다.
◆켈런에서는 주민위원회의 권한이 조금 늘었다.
주거.
학교.
공공보안 규칙에는 자문이 아니라 동의권 일부.
회사 경영.
물류.
투자.
여전히 이사회.
사라는 말했다.
“도시도 아니고 회사도 아닌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 가네요.”
엘레나.
“잘 굴러가면 꼭 이름 붙여야 해?”
사라.
“법원은 이름 좋아하던데.”
둘 다 웃었다.
◆하퍼는 정식 지역행정체로 전환.
다리우스는 초대 행정책임자 선거에 나가지 않았다.
“왜?”
노아미.
“도로만 해도 충분해.”
“정치 싫습니까?”
“좋아하면 더 위험하지 않나?”
그는 Mobility Director로 남았다.
방위단장이 시장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전환이었다.
◆브라운필드.
놀런 피어스는 전환사무실 종료식을 열지 않았다.
간판만 바꿨다.
Brownfield Civic Administration
무장조직 출신 지역안전대는 대부분 해산·전환.
총기비율 감소.
범죄는 잠깐 상승했다가 안정.
완벽한 성공 아님.
그래도 행정이 총 없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기능이 넘어갈 때 직원도 자동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연속성위원회로 이동.
어떤 사람은 노스리버에 남음.
어떤 사람은 퇴직.
직원대표가 말했다.
“조직이 작아지는 걸 성과로 쓰더라도 사람을 숫자로 줄이진 마세요.”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능 이전표 옆에 인력전환 결과도 같이 공개.
새 직장.
교육.
퇴직.
미배치.
기관이 작아지는 성공이 직원 개인의 실패가 되지 않게.
재건위원회.
에이드리언 임기 1년 남짓.
연속성위원회 출범으로 일부 기능을 넘긴다.
지역간 협약.
공동기금 일부.
상호운용.
전략안전 협의.
재건위원회는 노스리버 내부에 집중.
조직이 작아졌다.
에이드리언은 그걸 성과보고에 넣었다.
Functions transferred out: 7
토머스가 말했다.
“다른 기관에 일 뺏긴 걸 성과라고 쓰는 사람 처음 봅니다.”
“원래 목표였습니다.”
◆사미라 오코예가 첫 연속성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다.
에이드리언은 노스리버 대표단 뒤쪽에 앉았다.
발언은 두 번.
예전 같으면 열 번 했을 수도 있다.
마라가 나중에 물었다.
“심심했어?”
“조금.”
“좋은 신호네.”
◆결혼 날짜까지 11개월.
마라는 초대명단을 다시 줄이고 있었다.
“모리스가 사람 하나 더 넣었어.”
“누구?”
“본인 애인.”
“있었습니까?”
“우리도 몰랐어.”
둘은 놀랐다.
모리스는 전쟁보다 개인사를 더 잘 숨겼다.
◆헌장 서명 마지막.
각 참여주체 대표가 자기 깃발 아래 서명.
공통깃발 없음.
공통국가 없음.
공통군대 없음.
그런데 공통문서는 있었다.
노아미가 에이드리언에게 물었다.
“이제 연방의 시작입니까?”
그는 문서를 봤다.
“아직.”
“당신의 ‘아직’은 이제 긍정적인 말처럼 들리네요.”
“그런가요?”
“예전엔 위험이 아직 안 끝났다는 뜻이었고.”
“지금은?”
“뭔가 아직 시작 안 했다는 뜻.”
에이드리언은 웃었다.
◆서명식 뒤 사미라는 공통 사진촬영도 짧게 끝냈다.
“깃발 가운데 서는 사람 정하느라 또 싸우기 싫습니다.”
그래서 대표들은 한 줄이 아니라 반원으로 섰다.
중앙자리 없음.
노아미가 말했다.
“사진 구도가 이상한데요.”
사미라.
“정치적으로는 좋습니다.”
사진은 예쁘진 않았다.
그래도 누가 중심인지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서명 뒤 깃발들이 하나씩 내려갔다.
각 지역 대표가 자기 깃발을 가져갔다.
하나로 합치지 않았다.
오리슨 홀에는 빈 깃대만 남았다.
직원이 물었다.
“공통기 하나 걸까요?”
사미라가 말했다.
“아직은 필요 없습니다.”
에이드리언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았다.
자기가 아니어도 누군가 같은 선을 알고 있었다.
◆오리슨 중앙역 전광판도 몇 년 전과 달라졌다.
OCN 표시가 붙은 노선은 이제 특별노선이 아니었다.
대부분 일반시간표에 흡수.
사람들은 회랑 이름을 몰라도 열차를 탔다.
가장 성공한 인프라는 사람이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인프라일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2093년 가을.
전쟁이 끝난 지 2년 9개월.
사람들은 같은 국가가 되지 않았다.
같은 역사도.
같은 법도.
같은 깃발도.
그런데 한쪽 도시의 전력고장이 다른 쪽 기술자를 부르고,
한쪽 병원의 환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한쪽 법원의 판결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정 범위 인정되고,
한 지역을 떠난 사람이 다른 곳에서 주민이 될 수 있었다.
세계는 통합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채로 조금 더 연결됐다.
에이드리언은 그 정도면 충분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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