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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54화 — 화재

자유의 세기 · 54 / 516약 8분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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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는 새벽 세 시 십이 분에 시작됐다.

북부 식량창고 4번동.

첫 신고는 창고 경비원.

두 번째는 인근 주민.

세 번째는 철도 야간배차원.

시민비상연락망 호출은 세 시 십팔 분.

이번에는 첫 정전 때보다 훨씬 빨랐다.

소방대는 이미 출동 중이었다.

문제는 불이 아니었다.

창고 4번동 옆에는 등유와 포장재 저장고가 있었다.

바람은 북쪽.

불길이 번지면 한 블록 전체가 위험했다.

그리고 식량창고에는 다음 이틀치 도시 배급 일부가 있었다.

세레빈은 전화를 받고 차량기지 야간반에서 바로 나왔다.

안토노바는 집에서.

모로지나는 병원 야간진료 중.

베레노프는 사단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다.

할크로프트는 대사관 숙소에서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깼다.

이번에는 그에게도 전화가 왔다.

일리야 코렌이었다.

“영국인 맞죠?”

“네.”

“차 있습니까?”

할크로프트는 잠깐 멈췄다.

“있습니다.”

“소방차 예비호스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운전수가 없습니다.”

“왜 저한테?”

“명단에 당신 번호는 없는데 세레빈이 혹시 차 필요하면 전화해보라고 했습니다.”

할크로프트는 침대 옆 귀환표를 봤다.

런던 지시.

관여 금지.

그리고 전화기.

“주소.”

십 분 뒤 그는 대사관 차량을 몰고 있었다.

공식 차량을 민간 비상연락망에 쓰는 건 더 큰 문제였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예비호스 창고는 불길과 반대편에 있었다.

소방대 직원 둘이 호스를 실었다.

“대사관 차 아닙니까?”

한 명이 물었다.

“맞습니다.”

“문제 안 됩니까?”

“아마.”

“‘아마’로 운전해도 됩니까?”

“오늘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창고 지붕 절반을 덮고 있었다.

소방대는 물을 뿌리고 있었고,

식량창고 노동자들은 옆 동의 자루를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세레빈이 소리쳤다.

“사람부터 빼!”

“물건 안 빼면 내일 배급—”

“사람부터!”

그 목소리는 사고 뒤 달라져 있었다.

말로프가 죽은 이후 그는 생산보다 인원 확인을 먼저 했다.

베레노프는 군 트럭 두 대를 보내 등유 저장고 주변을 비우고 있었다.

총은 가져오지 않았다.

모로지나는 부상자 분류를 시작했다.

안토노바는 경찰책임자와 출입통제선을 정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첫 문제가 생겼다.

창고 책임자가 외쳤다.

“4번동 안에 장부가 있습니다!”

세레빈이 말했다.

“버려!”

“배급기록 원본입니다!”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버려!”

책임자가 불길을 봤다.

“내일 배급 못 합니다!”

안토노바가 말했다.

“사본 없습니까?”

“시청에 일부.”

“그럼 충분합니다.”

책임자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때 젊은 창고노동자 하나가 안으로 뛰려 했다.

세레빈이 그의 외투를 잡아당겼다.

“뭐 해!”

“장부!”

“종이 때문에 죽을래?”

“우리 아버지가 책임자입니다. 잃어버리면—”

세레빈은 그를 벽 쪽으로 밀었다.

“잃어버린 책임은 내가 같이 진다.”

불길이 창문을 깨고 나왔다.

누구도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세 시 오십 분.

바람 방향이 바뀌었다.

불이 등유 저장고 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소방대장은 말했다.

“저장고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베레노프가 물었다.

“폭발범위?”

“한 블록.”

“주민대피?”

경찰책임자가 말했다.

“아직.”

안토노바가 물었다.

“누가 대피명령 권한 있습니까?”

경찰.

소방.

시청.

각자 일부 있었다.

그 순간 할크로프트는 로시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마주친 세 열차를 떠올렸다.

또 권한.

또 우선순위.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더 빨랐다.

소방대장이 말했다.

“화재위험 기준으로 내가 요청합니다.”

경찰책임자가 말했다.

“대피집행은 우리가 합니다.”

시청 야간당직자가 말했다.

“구호소는 학교 두 곳 엽니다.”

안토노바가 기록했다.

누구도 한 기관이 모든 권한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역할을 나눴다.

대피가 시작됐다.

시민비상연락망 인원 중 호출된 사람은 23명까지 늘었다.

코렌은 소방차와 주민수송 사이를 오갔다.

베크 수간호사는 학교 구호소에서 노인·환자 명단을 만들었다.

이바닌은 식량창고 열쇠와 남은 재고를 확인했다.

류드밀라 사빈은 전력차단 구역을 정했다.

마흔 명 명단이 처음으로 단순 연락망보다 커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 부재는 곧 드러났다.

소방대장은 등유 저장고 포기를 주장했다.

창고책임자는 반대했다.

“저거 잃으면 다음 주 난방물량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다음 주가 있죠.”

시청 야간당직자는 대피범위를 더 넓히고 싶어 했다.

경찰책임자는 인력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누구 말이 최종인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베레노프가 말했다.

“지휘관 하나 정하자는 뜻은 아니오. 지금 상황의 최종판단 분야를 정합시다.”

화재확산은 소방.

대피집행은 경찰.

의료는 병원.

도로통제는 시청·경찰 공동.

군수지원은 군.

그들은 사람 한 명 대신 결정영역을 나눴다.

소방대장이 등유 저장고 주변 철수를 명령하자 누구도 다시 뒤집지 않았다.

지휘관 없는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모든 결정을 공동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결정은 누구에게 맡길지 미리 알아야 했다.

그 부재는 곧 드러났다.

소방대장은 등유 저장고 포기를 주장했다.

창고책임자는 반대했다.

“저거 잃으면 다음 주 난방물량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다음 주가 있죠.”

시청 야간당직자는 대피범위를 더 넓히고 싶어 했다.

경찰책임자는 인력 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누구 말이 최종인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베레노프가 말했다.

“지휘관 하나 정하자는 뜻은 아니오. 지금 상황의 최종판단 분야를 정합시다.”

화재확산은 소방.

대피집행은 경찰.

의료는 병원.

도로통제는 시청·경찰 공동.

군수지원은 군.

그들은 사람 한 명 대신 결정영역을 나눴다.

소방대장이 등유 저장고 주변 철수를 명령하자 누구도 다시 뒤집지 않았다.

지휘관 없는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모든 결정을 공동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결정은 누구에게 맡길지 미리 알아야 했다.

그게 장점이면서 문제였다.

네 시 십오 분.

저장고 옆에서 작은 폭발이 났다.

유리창이 깨졌다.

사람들이 몸을 숙였다.

할크로프트 귀가 먹먹해졌다.

잠깐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그 뒤 누군가 소리쳤다.

“부상자!”

창고노동자 둘.

경찰 하나.

할크로프트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려 했다.

모로지나가 소리쳤다.

“거기 있지 마요! 차 가져와요!”

그는 멈췄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달랐다.

차를 돌렸다.

부상자 셋을 병원으로 옮겼다.

한 명은 다리 골절.

한 명은 유리상.

경찰은 고막 손상.

사망자는 없었다.

새벽 여섯 시 오십 분,

큰 불길이 잡혔다.

부상자 명단을 확인한 모로지나는 다시 현장으로 왔다.

“셋 다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숨을 조금 놓았다.

창고 책임자가 탄 건물을 보며 말했다.

“배급장부 절반이 탔습니다.”

안토노바가 물었다.

“사본은?”

“시청에 일부.”

세레빈이 말했다.

“오늘 아침 배급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합시다.”

책임자는 불탄 창고를 계속 봤다.

“저 장부 내가 관리했습니다.”

“그래서요?”

“사람들이 내가 못 지켰다고 할 겁니다.”

세레빈이 말했다.

“나도 아까 같이 버리자고 했습니다.”

“그걸 누가 압니까?”

“회의록에 쓰죠.”

안토노바가 바로 말했다.

“화재현장 안전 때문에 장부회수를 포기했다고.”

책임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만 쓰이지 않았다.

때로는 사람이 올바르게 포기했다는 걸 남기는 데도 필요했다.

4번동은 절반 이상 탔다.

등유 저장고 일부도 손실.

다른 식량창고는 지켰다.

주민 430명 대피.

병원 응급실 11명.

사망 0.

세레빈은 숫자를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다행입니까?”

할크로프트가 물었다.

“네.”

“표정은 아닌데.”

“말로프 때도 숫자는 작았습니다.”

세레빈은 탄 창고를 봤다.

“사망 0이면 오늘은 좋은 날이죠.”

그 말에는 기쁨보다 경계가 있었다.

오전 아홉 시,

언론이 몰려왔다.

그 전에 대피했던 주민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빵집 소동 때 봤던 레나도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모로지나가 알아봤다.

“또 만났네.”

레나가 말했다.

“이번엔 빵 안 줘요?”

주변에서 웃음이 났다.

“오늘은 집에 가.”

아이 어머니는 탄 창고를 봤다.

“우리 배급은요?”

세레빈이 말했다.

“일부 탔습니다. 오후에 새 계획 냅니다.”

“숨기지 말고 말해주세요.”

“그럴 겁니다.”

그 한마디가 할크로프트 귀에 오래 남았다.

사람들이 완벽한 공급보다 먼저 요구하기 시작한 게 있었다.

무슨 일이 났는지 숨기지 말 것.

몇 주 전 빵집 앞의 군중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도시도 배우고 있었다.

질문은 예상보다 빨랐다.

“시민비상연락망이 도시대피를 지휘했습니까?”

안토노바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현장에 조직적으로 투입됐잖습니까.”

“소방·경찰·시청 요청에 따라 지원했습니다.”

“누가 지휘했습니까?”

“각 기관이 자기 업무를 지휘했습니다.”

기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연락망은 뭘 했습니까?”

세레빈이 옆에서 말했다.

“전화받았습니다.”

기자는 만족하지 못했다.

좋은 제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신문은 결국 이렇게 썼다.

시민비상대, 북부화재서 400여 명 대피 지원

또 이름이 달라졌다.

안토노바는 화내려다가 포기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무행정국이 공식조사를 통보했다.

비공식 민간조직의 재난현장 활동 범위 및 지휘체계 확인.

시장 대행은 말했다.

“이제 공식화해야 합니다.”

세레빈이 반대했다.

“오늘 잘됐다고 바로?”

“오늘 같은 일이 또 나면?”

베레노프가 말했다.

“그 질문 때문에 공식화할 수는 있소.”

안토노바가 말했다.

“공식화하면 누가 지휘합니까?”

모두 서로를 봤다.

오늘은 지휘관이 없어서 잘된 부분도 있었다.

각 전문기관이 자기 판단을 했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이었다면?

누군가는 전체 결정을 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첫 성공보다 두 번째 성공이 더 어려웠다.

오후 평가회의에서 소방대장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연락망 없었어도 불은 껐을 겁니다.”

시장 대행이 놀랐다.

“그럼 효과가 없었다는 겁니까?”

“아뇨. 불은 소방이 껐습니다.”

그는 명단을 짚었다.

“연락망은 내가 불만 보게 해줬어요.”

주민대피는 경찰.

환자수송은 병원.

예비호스는 운송지원.

전력차단은 기술자.

“예전이면 내가 사람까지 찾고 전화까지 했을 겁니다.”

안토노바는 회의록 첫 줄에 적었다.

연락망의 목적은 기존 기관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간 공백을 연결하는 것.

한 기관을 더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기관이 자기 일을 하게 만드는 조직.

그 정의는 모두에게 꽤 마음에 들었다.

오후 평가회의에서 소방대장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연락망 없었어도 불은 껐을 겁니다.”

시장 대행이 놀랐다.

“그럼 효과가 없었다는 겁니까?”

“아뇨. 불은 소방이 껐습니다.”

그는 명단을 짚었다.

“연락망은 내가 불만 보게 해줬어요.”

주민대피는 경찰.

환자수송은 병원.

예비호스는 운송지원.

전력차단은 기술자.

“예전이면 내가 사람까지 찾고 전화까지 했을 겁니다.”

안토노바는 회의록 첫 줄에 적었다.

연락망의 목적은 기존 기관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간 공백을 연결하는 것.

한 기관을 더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기관이 자기 일을 하게 만드는 조직.

그 정의는 모두에게 꽤 마음에 들었다.

할크로프트는 회의 끝까지 있었지만 아무 의견도 내지 않았다.

대사관으로 돌아가기 전 안토노바가 물었다.

“오늘 차 썼죠?”

“네.”

“대사관 차.”

“네.”

“런던에 보고합니까?”

할크로프트는 불에 그을린 차량 옆문을 봤다.

“해야겠죠.”

“후회합니까?”

“아직.”

“그 답 좋아하네요.”

“직업병입니다.”

안토노바가 말했다.

“이제 직업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보죠.”

귀환까지 여섯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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