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8화 — 보로닌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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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크라비나는 곡물을 숨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알렉세이 보로닌은 바닥판을 열었다.
밀자루 여섯 포대가 나왔다.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씨앗입니다.”
“전부?”
“대부분.”
“나머지는?”
“겨울 식량.”
할크로프트는 옆에서 기다렸다.
보로닌이 자루 하나를 열어 곡물을 확인했다.
“좋은 밀입니다.”
“그래서 씨앗으로 남긴 겁니다.”
“매입관이 왔습니까?”
“어제.”
“뭐라고 했습니까?”
“계약량이 부족하다고.”
안나는 새 중앙 곡물매입지침을 내밀었다.
경작권 분쟁이 있는 토지는 등록소의 법적 소유자를 기준으로 지급한다.
지난번 마을에서 합의한 신탁조항은 예외로 인정되지 않았다.
“왜 바뀌었습니까?”
할크로프트가 물었다.
보로닌이 문서를 읽었다.
“통일규정.”
마을회관에는 중앙 농정국 관리 세르게이 로마닌, 지방등록소 직원, 지주대리인, 경작농 대표가 모였다.
로마닌은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지방마다 다른 신탁조항을 인정하면 지급분쟁이 끝없이 생깁니다. 법적 소유권을 기준으로 해야 행정이 가능합니다.”
보로닌이 물었다.
“실제 경작자는?”
“소유자와 계약관계입니다.”
안나가 말했다.
“계약이 불공정하면요?”
“법원에 다툴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곡물값은 지주가 받고?”
“현행법상 그렇습니다.”
보로닌이 물었다.
“정부 목적이 곡물을 확보하는 겁니까, 토지소유권을 정리하는 겁니까?”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 적용 때문에 농민들이 곡물을 안 내면?”
“계약물량은 법적으로 납품해야 합니다.”
회관 뒤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할크로프트가 처음 입을 열었다.
“표준화가 왜 필요합니까?”
“회계 때문입니다.”
로마닌이 말했다.
“신탁계정이 40개 지역에서 40가지 방식입니다. 중앙재무국은 실제 지급채무를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럼 표준화할 대상이 지급절차지, 수령자가 아닐 수도 있겠군요.”
보로닌이 바로 이어받았다.
“신탁계정 형식은 하나로 통일. 소유권분쟁은 지방재판소 확인까지 동결.”
지방등록소 직원이 말했다.
“기존 토지번호를 쓰면 가능합니다.”
논의가 다시 움직였다.
완벽한 해결은 아니었다.
지주대리인은 반대했고, 농민들도 의심했다.
하지만 첫 계약은 유지됐다.
회의 뒤 안나가 물었다.
“그래서 저 밀은 안 가져갑니까?”
보로닌이 바닥 아래 자루를 봤다.
“씨앗으로 필요한 양은 남깁니다.”
“누가 정해요?”
“농업기술관.”
안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우리 밭을 압니까?”
보로닌이 말했다.
“그럼 같이 밭을 봅시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눈 아래 밭의 경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안나가 앞장섰다.
“아까 숨긴 적 없다고 하셨죠.”
할크로프트가 말했다.
안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숨겼으면 조사관님이 못 찾았겠죠.”
보로닌이 웃음을 터뜨렸다.
밭 끝에서 안나는 걸음을 멈췄다.
“도시에 말해 주세요.”
“뭘요?”
“우리가 곡물을 안 주고 싶은 게 아니라고.”
그녀는 눈 덮인 땅을 발끝으로 눌렀다.
“봄에 심을 게 없으면 내년엔 줄 것도 없습니다.”
할크로프트는 그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
기억해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안나의 큰딸은 할크로프트가 노트를 꺼내자 가까이 왔다.
“영어로 써요?”
“가끔.”
“우리 얘기도?”
할크로프트가 노트를 덮었다.
“원하면 안 쓸 수 있습니다.”
소녀는 잠깐 생각했다.
“엄마 이름은 써도 돼요.”
안나가 바로 말했다.
“왜 네가 정해?”
“엄마 유명해지면 좋잖아.”
“유명하면 세금부터 온다.”
보로닌이 웃었다.
할크로프트도 웃었지만 노트는 다시 열지 않았다.
이 가족에게 기록은 역사보다 세금과 징발에 가까운 것이었다.
누가 이름을 적는지는 생각보다 정치적인 일이었다.
마을회관에서 지주대리인은 중앙지침을 반겼다.
“법적 소유자에게 지급하는 게 당연합니다.”
안나가 돌아봤다.
“작년 수확 절반 가져갈 때도 법이라고 했죠.”
“계약입니다.”
“남편이 군대 가고 내가 밭 다 갈았는데도?”
“계약당사자는 남편입니다.”
보로닌이 끼어들었다.
“이런 경우가 몇 집입니까?”
지방등록소 직원이 장부를 봤다.
“이 마을만 열일곱.”
“남편이 군 복무 중인 집?”
“아홉.”
로마닌의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
중앙지침은 ‘법적 소유자’와 ‘경작자’만 봤다.
전쟁은 그 둘 사이에 부재한 사람을 만들어냈다.
“이건 토지법만의 문제가 아니군요.”
보로닌이 말했다.
안나가 대답했다.
“우리한텐 원래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회의 방향을 바꿨다.
회의는 점심을 넘겼다.
한 농민은 지주가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까지 소작료를 청구했다고 했고, 다른 농민은 지주가 아예 해외에 있어 계약 갱신조차 못 했다고 말했다.
지주대리인은 억울해했다.
“우리가 전부 나쁜 사람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세금도 우리가 냅니다.”
보로닌이 물었다.
“그 세금은 누구 돈으로 냅니까?”
“수익에서.”
안나가 말했다.
“그 수익은 누가 만드는데요?”
회의장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할크로프트는 처음에는 토지소유권 분쟁이라고 생각했다.
듣다 보니 군 복무, 가족대리권, 세금, 신용, 상속까지 한꺼번에 엮여 있었다.
세상은 정말 보고서처럼 한 문제씩 오지 않았다.
밭으로 나갈 때 농업기술관도 따라왔다.
젊은 남자였고 새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안나는 그 장화를 한 번 보고 말했다.
“수도에서 왔죠?”
“농업학교에서 왔습니다.”
“밭은 해봤어요?”
“실습은.”
“몇 년?”
“두 계절.”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보다 스무 해 적네요.”
기술관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대신 종자량 계산은 제가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봅시다.”
둘은 밭 경계에서 필요한 종자량을 계산했다.
안나는 경험으로 말했고, 기술관은 면적과 파종률로 계산했다.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안나가 말했다.
“쓸모 있네요.”
기술관이 대답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안나의 말 한 마리가 기침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보로닌이 갈비뼈를 만져봤다.
“사료 줄였습니까?”
“곡물 팔고 나면 더 줄여야죠.”
“말까지 팔면?”
“이웃 말 빌려야죠.”
“이웃도 팔면?”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크로프트는 그제야 오늘 더 많은 곡물을 확보하는 것과 내년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하는 것이 같은 목표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전쟁은 늘 지금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농업은 다음 계절까지 계산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큰딸이 할크로프트에게 물었다.
“영국에도 씨앗 숨겨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엄마가 나쁜 사람 아니죠?”
할크로프트는 안나를 봤다.
안나는 대답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결국 말했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녀는 못마땅해했다.
“어른들은 맨날 그래요.”
보로닌이 크게 웃었다.
그날 가장 어려운 질문은 토지법이 아니었다.
마을을 떠나는 날 아침, 로마닌은 안나의 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수정된 임시양식이 있었다.
경작자 부재사유.
군 복무자 가족대리 여부.
분쟁대금 신탁 여부.
안나는 양식을 받아들고 말했다.
“종이 한 장 늘었네요.”
로마닌이 피곤하게 웃었다.
“이번엔 필요한 종이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죠.”
그래도 안나는 서명했다.
큰딸이 옆에서 물었다.
“이제 우리 돈 바로 나와요?”
“아니.”
안나가 말했다.
“이제 왜 안 나오는지는 적을 수 있대.”
아이 표정은 실망스러웠다.
로마닌도 그 표정을 봤다.
“다음 단계는 더 빨리 나오게 하는 겁니다.”
안나가 말했다.
“그 말 기억할게요.”
로마닌은 잠깐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크로프트는 그 장면을 보며 행정개혁이 거대한 법률보다 칸 하나 늘어나는 방식으로 시작될 때가 있다는 걸 생각했다.
그리고 그 칸에 실제 사람의 사정이 들어갈 때 비로소 제도가 조금 덜 거칠어졌다.
네바그라드로 돌아가기 직전 안나에게 군 우편이 도착했다.
남편이 보낸 짧은 편지였다.
안나는 혼자 읽다가 큰딸에게 넘겼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춥다.
장화가 젖었다.
집 걱정 말라.
그리고 마지막 줄.
봄씨는 꼭 남겨 둬.
안나는 그 문장을 보로닌에게 보여줬다.
“이 사람도 숨기라네요.”
보로닌이 말했다.
“씨앗을 남기는 건 숨기는 게 아닙니다.”
“매입관은 다르게 생각하던데.”
할크로프트는 편지를 보며 오늘 회의의 모든 법률용어보다 그 한 줄이 더 명확하다고 느꼈다.
전선에 있는 사람도 다음 봄을 계산하고 있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