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9화 — 곡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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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보로닌은 가격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게 할크로프트에게는 이상했다.
네바그라드에서 들은 설명은 단순했다.
정부의 곡물 매입가격이 너무 낮다.
농민이 팔지 않는다.
가격을 올리면 곡물이 나온다.
경제학 교과서라면 세 줄로 끝날 문제였다.
마을로 들어오기 전 보로닌은 일부러 상점을 먼저 들렀다.
선반에는 소금과 성냥은 있었지만 등유통은 거의 비어 있었다.
쟁기날을 파는 자리는 아예 빈 못만 남아 있었다.
상점 주인이 말했다.
“돈은 있습니다.”
“물건이 없고?”
“네.”
그는 서랍에서 지폐를 꺼내 보였다.
농민들이 지난달 곡물을 팔고 받은 돈이었다.
“그래서 다들 곡물을 안 팝니까?”
할크로프트가 물었다.
상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팔 사람은 팝니다. 문제는 받고 싶은 게 돈만은 아니라는 거죠.”
밖에서는 농부 한 명이 부러진 쟁기날을 대장장이에게 맡기고 있었다.
대장장이는 같은 철조각을 세 번째 덧대고 있다고 했다.
보로닌이 할크로프트에게 말했다.
“수도에서는 곡물가격을 올리면 공급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그 돈으로 살 물건이 있으면요.”
그들은 안나 크라비나의 밭 옆을 지나갔다.
두 딸이 마른 풀을 묶고 있었다.
말 한 마리가 갈비뼈를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보로닌은 가격 이야기를 하기 전에 등유와 쟁기날을 물었다.
할크로프트는 이제 이유를 알았다.
그런데 보로닌은 마을회관에 모인 농민들에게 가격이 아니라 등유부터 물었다.
“지난달에 얼마나 들어왔습니까?”
마을 대표가 말했다.
“예정량의 절반.”
“소금은?”
“괜찮았습니다.”
“쟁기날?”
이번에는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구하라고요?”
보로닌은 옆 사람에게 적으라고 했다.
할크로프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곡물 협상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등유를 묻습니까?”
“돈을 받아서 살 게 있어야 가격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할크로프트는 입을 다물었다.
보로닌은 회의 앞쪽에 앉았다.
회의 전 안나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프에는 감자보다 물이 많았다.
안나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손님 온다고 씨앗 먹을 순 없잖아요.”
보로닌이 말했다.
“당연하죠.”
할크로프트는 나무식탁 한쪽의 작은 장부를 봤다.
“이건 뭡니까?”
안나의 큰딸이 대답했다.
“엄마가 쓴 거예요.”
등유.
소금.
말 사료.
빚.
지주 몫.
지난해 수확량.
안나가 장부를 덮었다.
“도시에선 농민이 계산 안 하는 줄 압니까?”
“아뇨.”
“그런 얼굴이었는데.”
할크로프트가 보로닌을 봤다.
보로닌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안나는 그제야 장부를 다시 열었다.
“곡물을 지금 다 팔면 빚은 갚아요.”
“그럼 왜 안 팝니까?”
“봄 종자 사려면 다시 빚내야 하니까.”
“가격이 더 오르면?”
“그래도 씨앗은 남깁니다.”
“정부가 강제로 사면?”
안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밖에서 말이 울었다.
안나의 큰딸이 일어나 창문을 봤다.
“또 사료 안 먹어요.”
안나는 한숨을 쉬었다.
“겨울 지나면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보로닌이 물었다.
“말까지 팔면 봄갈이는?”
“이웃한테 빌리든가.”
“이웃도 팔면?”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크로프트는 그제야 곡물 판매량과 내년 생산량이 같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체감했다.
오늘 더 많이 가져가면 도시가 산다.
너무 많이 가져가면 내년 공급이 줄어든다.
전쟁은 늘 지금 필요한 것을 요구했고,
농업은 늘 다음 계절까지 계산했다.
“그럼 내년엔 정부가 밭도 갈아야죠.”
말투는 담담했다.
할크로프트는 그 말이 위협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걸 알았다.
농촌의 저항은 구호보다 장부에서 먼저 시작될 수 있었다.
군관구 구매장교, 지역 상인, 마을 대표들이 반원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구매장교가 말했다.
“도시는 3주치 비축밖에 없습니다.”
농민 하나가 대답했다.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작년에는 실제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곡물을 가져갔고 대금은 넉 달 뒤에 받았지요.”
“지금은 지급보증을 합니다.”
“누가 보증합니까?”
“재무국.”
마을 안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상인이 끼어들었다.
“나는 현금으로 지급하겠습니다.”
구매장교의 얼굴이 굳었다.
“정부 매입가격보다 높게?”
“내 돈인데요.”
“그 곡물이 도시에서 더 비싸게 팔리겠지.”
“운송하고 보관하는 데 돈이 듭니다.”
“전쟁 중 폭리를 말하는 겁니까?”
상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쟁 중 손실도 제가 봅니다.”
회의는 두 시간째 같은 곳을 돌고 있었다.
양보에는 각자의 비용이 붙었다.
할크로프트는 보로닌에게 속삭였다.
“정부가 가격을 15퍼센트 올리면?”
보로닌이 말했다.
“어제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오늘은요?”
“현금이 있어도 쟁기날이 없잖습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안이 있습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정부 매입량의 절반은 현금.”
농민들이 듣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지역협동조합 계좌로 지급합니다.”
누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돈입니까?”
“농기계, 등유, 소금, 종자 구매에 우선 사용할 수 있는 신용입니다. 정부가 물품 공급계약을 같이 보증합니다.”
상인이 말했다.
“그럼 민간상인은?”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누가 정합니까?”
“공개입찰.”
상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관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구매장교가 물었다.
“곡물 인도는 언제?”
“첫 열차는 일주일.”
“사흘.”
“그러면 아무도 안 팝니다.”
“도시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농촌도 내년까지 살아야 합니다.”
보로닌은 구매장교의 계산표를 끌어당겼다.
“사흘 안에 20퍼센트. 일주일 안에 50퍼센트. 나머지는 열흘.”
구매장교가 계산했다.
“부족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는 양입니다.”
그 한마디가 먹혔다.
회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부조건에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마지막 서명 직전, 뒤쪽에서 여자가 손을 들었다.
나이가 마흔쯤 되어 보였다. 손등은 갈라져 있었고, 회관에 들어와서도 외투를 벗지 않았다.
“질문 있습니다.”
보로닌이 말했다.
“하십시오.”
“안나 크라비나입니다. 남편은 서부선에 있고, 지금은 두 딸하고 밭을 경작합니다.”
보로닌이 이름을 받아 적었다.
“말씀하십시오.”
“곡물값은 땅 주인에게 지급합니까?”
“곡물 소유자에게 지급합니다.”
“그럼 우리 집은요?”
“무슨 뜻입니까?”
“땅은 지주의 겁니다. 우리가 경작하고 수확합니다. 계약상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갑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여자가 말했다.
“정부가 곡물을 사면 누구한테 돈을 줍니까?”
보로닌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확신이 사라졌다.
구매장교도, 상인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크로프트는 그 순간 자신이 네바그라드에서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가격을 올리면 곡물이 나온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곡물이 누구 것인지부터 결정되어 있어야 했다.
보로닌이 여자에게 물었다.
“계약서를 볼 수 있습니까?”
“집에 있습니다.”
“가져와 주십시오.”
“오늘 계약은요?”
보로닌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도시는 기다릴 수 없었다.
농촌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서명란 위에 한 조항을 손으로 추가했다.
소유권 또는 경작권 분쟁이 있는 물량의 대금은 지역신탁계정에 예치하며, 분쟁 해결 전 어느 일방에도 지급하지 않는다.
구매장교가 말했다.
“그럼 돈이 묶입니다.”
“맞습니다.”
“농민들이 싫어할 텐데요.”
뒤쪽의 여자가 말했다.
“안 묶으면 우리가 싫어합니다.”
몇 사람이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계약은 체결됐다.
마을을 나오는 길에 할크로프트가 물었다.
“신탁계정은 원래 계획에 있었습니까?”
“아뇨.”
“그럼 나중에 문제가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그래도 서명했고.”
“도시는 곡물이 필요합니다.”
보로닌이 말을 몰며 말했다.
“정치는 대부분 그런 겁니다. 내일의 문제를 만들지 않고 오늘의 문제를 푸는 방법이 있다면 나도 배우고 싶군요.”
할크로프트는 방금 들은 조건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묶었다.
“가격 문제가 아니었네요.”
“가격 문제도 맞습니다.”
“토지 문제이기도 하고.”
“그것도 맞고.”
“신용 문제.”
“맞습니다.”
“운송 문제.”
보로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조사관님.”
“네.”
“세상이 보고서처럼 한 문제씩 와주지는 않습니다.”
회관 문 앞에서 안나 크라비나가 두 사람을 불렀다.
그녀는 신탁조항이 덧붙은 계약서 사본을 들고 있었다.
“이게 정말 지켜집니까?”
보로닌이 말했다.
“지키게 해야지요.”
“그 말은 작년에도 들었습니다.”
보로닌은 변명하지 않았다.
안나는 종이를 접었다.
“도시는 이번 겨울을 걱정하겠죠.”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다음 봄도 걱정합니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할크로프트는 그 말을 오래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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