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211화 — 영웅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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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 벤카의 이름은 아직 교과서에 있었다. 세르마크 구조전 당시 수천 명을 살리고, 대단절 이후 새 제국권에서 비아틀라스계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완전시민권을 받은 사람 중 하나. 그의 손녀는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라 벤카. 나이 63. 제국 지방법원 공공변호사.
그녀가 황궁 청문회에 불려온 이유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보호국 출신 시민의 형사재판에서 통역권이 자꾸 늦게 붙는 문제. 미라는 지난 7년 동안 같은 오류를 43번 봤다. 피고가 제국어를 일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률통역이 자동배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상회화와 형사법정 언어는 다르다. 한 로하르계 피고는 ‘조건부 인정’을 죄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한 베르단계 피고는 보석조건을 잘못 번역해 외출제한을 위반했다.
법원은 나중에 고쳤다. 사람은 이미 며칠씩 구금된 뒤였다. 미라는 황제에게 길게 인사하지 않았다.
“시민권이 있어도 언어는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 그런데 행정은 종종 시민권을 언어능력처럼 사용했다. 법무원은 즉시통역 확대안을 냈다. 문제는 비용과 인력. 15개 주요언어는 가능. 희귀언어 수백. 세레프 개념코드. 분산지성.
◆자동번역을 쓰면 빠르다. 그러나 과거의 번역사고가 떠오르는 문제였다. 법률통역은 단어 하나가 형량을 바꿀 수 있다. 결국 3층 구조. 일반절차는 자동번역. 권리포기·유죄인정·형량·추방·시민권 박탈 같은 핵심절차는 인증통역사 또는 법률개념 검증기능을 반드시 거친다. 희귀언어는 루멘 통역망까지 연계. 미라는 제도안을 보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통역을 요청해야 받을 수 있으면 똑같습니다.”
피고가 자기 언어한계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 새 기준은 판사가 첫 심리에서 법률이해도를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질문 세 개. 피고가 자기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자동통역. 간단했다. 제도 시행 첫해 통역비용은 31퍼센트 늘었다. 재판지연은 줄었다. 보석조건 위반도 감소. 법무원은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미라는 보고서를 보고 말했다. “이제 시작이죠.” 언론은 미라를 계속 ‘오르 벤카의 손녀’라고 불렀다. 그녀는 인터뷰 첫 질문마다 고쳤다. “공공변호사 미라 벤카입니다.”
기자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이름이 더 잘 팔린다. 미라 입장에서는 40년 전에 죽은 사람의 후손으로 평생 일할 생각이 없었다.
◆오르 벤카의 시민권은 당시 거대한 사건이었다. 미라에게 시민권은 출생등록 때부터 있었다. 황제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받은 것도 아니고, 구조영웅의 피를 물려받아서 받은 것도 아니다. 부모가 시민이고 본인도 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게 전부.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영웅혈통을 찾았다. 법원 동료조차 말했다. “그래도 할아버지 영향 때문에 이 직업 고른 것 아닙니까?” 미라는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구조대였습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둘 다 사람을 돕는 직업이라고 연결하려 하면 더 짜증냈다. 어느 날 미라가 맡은 사건의 피고는 세르마크 출신 준시민이었다. 불법무기 사건. 증거는 명확. 미라는 무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대신 수사과정에서 통역이 제대로 없었던 진술 하나를 배제시켰고, 실제 가담범위에 맞게 혐의를 줄였다. 피고는 유죄. 형량도 받았다. 재판 뒤 피고 가족이 물었다. “같은 세르마크라 도와주신 겁니까?” 미라가 피곤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 일이어서 했습니다.”
그 장면이 우연히 법원 기록다큐에 들어갔다. 본토망에서 많이 퍼졌다. 이번에도 기사 제목에는 오르 벤카가 들어갔다. 미라는 포기했다. 시민권 2세대의 문제는 차별만이 아니었다. 상징이 너무 오래 따라붙는 것도 있었다. 첫 번째 비아틀라스 시민. 첫 번째 로하르 장군. 첫 번째 AI 의원. 첫 번째 복수시민 함장. 처음은 기록되기 쉽다. 두 번째부터가 사회다. 황궁은 ‘첫 사례’ 홍보를 줄이기로 했다. 법적·역사적 의미가 큰 경우만. 일반 인사·취업·선거는 특별한 배경이 있어도 사람 본인 직책을 먼저 쓴다. 작은 편집지침.
◆미라에게 알려주자.
“그걸 왜 황궁에서 정합니까?”
맞다. 황실 대변인 지침일 뿐. 언론까지 강제할 수 없다. 몇 년 뒤 미라는 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언론은 또 오르 벤카 손녀라고 썼다. 첫 판결은 아주 평범한 임대차 분쟁이었다. 사건가액도 작았다. 그날 법원 앞에는 기자가 세 명뿐이었다. 미라는 만족했다.
판결문 첫 줄에는 혈통도 종족도 없었다. 원고. 피고. 계약. 그걸로 충분했다. 미라가 판사가 된 뒤에도 통역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새 제도는 법정 안을 고쳤지만, 경찰 조사와 행정심문에는 적용범위가 달랐다. 한 세르마크계 시민이 세금조사에서 자동번역만 받고 자진신고서에 서명했다. 나중에 보니 번역이 법률상 ‘고의누락’과 ‘미신고’를 구분하지 못했다. 형사사건으로 넘어갈 뻔했다. 미라는 판사 신분이라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법원행정위원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법정에서만 정확하면 늦습니다.”
법무원·세무원·경찰청이 공동으로 ‘권리영향 번역’ 범위를 만들었다. 세금가산. 출국제한. 면허취소. 복지박탈. 형사전환 가능성. 이런 결정에는 인증통역이 필요하다. 단순 민원안내는 자동번역. 정부기관마다 “우리 업무도 중요하다”며 인증대상을 늘리려 했다. 예산은 한정. 결국 실제 권리손실 가능성 기준. 무슨 부처인가가 아니라 결과가 무엇인가. 미라는 이 기준을 좋아했다. 부처서열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기는 일을 보는 방식.
◆법률통역사 부족도 새로운 직업시장을 만들었다. 로하르·베르단·칼리스테르·아르칸트 언어를 아는 젊은 시민들이 자격시험에 몰렸다. 일부는 부모 언어를 취업 때문에 다시 배웠다. 203의 문화교육과도 연결됐다. 어릴 때 싫어했던 로하르어가 법원 취업에 유리해진 학생. 부모가 좋아했다. 아이 본인은 돈 때문이라고 했다. 둘 다 만족. AI 통역도 인증대상으로 들어왔다. 모델별 평가. 오역률. 법률개념. 분기지성 언어.
한 업체가 자기 시스템 정확도 99.99퍼센트라고 광고했다. 시험해보니 일반문장. 형사법률은 96.8. 과징금. 광고수정. ‘거의 정확’이 법정에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미라는 판사로 일하며 통역이 필요한 사건을 특별히 더 관대하게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절차가 제대로 되면 결과는 더 선명해졌다. 유죄면 유죄. 무죄면 무죄.
한 피고인이 판결 뒤 소리쳤다.
“같은 세르마크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미라는 답하지 않았다.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로 형량을 깎는 것도 차별의 다른 형태다. 법원 밖 기자가 물었다. “상징적 부담을 느끼십니까?”
◆“무슨 상징.”
“오르 벤카의 후손으로서.”
미라는 잠깐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 질문합니까?”
영상이 퍼졌다. 이번에는 기사 제목이 달랐다.
[판사 미라 벤카, ‘아직도 그 질문합니까’.]
조금 나아졌다. 오르 벤카 기념재단은 손녀에게 명예이사직을 제안했다. 미라는 거절했다. 이유.
“법관이 가족재단 이사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재단도 더 권하지 않았다. 그녀의 형제는 반대로 재단에서 일했다. 같은 가족. 다른 선택. 오르 벤카 이름은 교과서에 남았지만, 후손들이 전부 그 이름을 직업으로 물려받지는 않았다. 시민권이 세습되는 것과 영웅역할이 세습되는 건 다르다. 미라가 고등법원 승진심사를 받을 때 심사표에는 가문·혈통 항목이 없었다. 판결파기율. 절차오류. 사건처리. 동료평가.
승진. 기자들은 또 할아버지를 언급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고치지도 않았다. 기사보다 다음 재판 준비가 더 급했다. 미라가 고등법원에 간 뒤 첫해, 법률통역제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자동번역 시스템이 너무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조금만 애매해도 인증통역사를 호출했고, 단순 과태료 사건까지 지연됐다. 법원 직원들은 불평했다.
◆“이러다 모든 사건에 통역사를 붙이겠습니다.”
미라는 제도를 되돌리자고 하지 않았다. 위험등급을 더 세분화했다. 권리박탈 가능성이 낮은 절차는 자동번역 우선. 중대한 결과가 가능한 단계에서만 인간검증. 정확성과 속도 사이를 계속 조정했다. 한 제도는 사고 뒤 강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너무 무거워질 수 있다. 그걸 줄이는 것도 개혁이었다. 미라는 이런 수정과정을 좋아했다. 영웅적이지 않아서. 오르 벤카 기념일에 가족대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이 또 왔다. 이번엔 거절문도 짧았다.
[재판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재판이 있었다. 평범한 노동계약 사건. 그날 미라는 기념행사보다 그 사건을 택했다. 누구도 역사적 의미를 붙일 필요 없었다. 미라가 판사가 된 지 20년째, 법원은 더 이상 그녀를 ‘비아틀라스 대표법관’으로 행사에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형사절차 개정위원으로 불렀다. 종족이 아니라 경력. 미라는 그 초청장은 받아들였다. 미라는 그 뒤 법원 연수과정에서 후배 판사들에게 한 가지를 반복했다. 통역이 붙었다고 절차가 끝난 게 아니라, 당사자가 실제로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
제도가 사람 대신 이해해주는 건 아니었다. 미라는 그 기준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라는 다음 재판기록을 열었다. 이번 사건에는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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