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91화 — 예외를 규칙으로
지난 화 끝부분 다시 보기
마리안이 들고 온 통합안의 첫 장에는 조약 이름이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거창한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완성된 질서라고 착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사고가 날 때마다 덧댄 규칙을 서로 충돌하지 않게 정리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루멘 등록규칙. 남동협정. 칼리스테르 충돌방지의정서. 베르단 긴급영사접근 판례. 하디안 접근규칙. 네리안 중립주둔 원칙.
각각 만들어진 이유와 적용범위가 달랐다. 마리안이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같은 사건에 서로 다른 규칙이 동시에 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르칸트 가입협상국 안에서 칼리스테르 함대와 제국 민간선이 충돌하면, 남동협정과 루멘 경계규칙과 칼리스테르 의정서가 다 적용됩니다.”
“좋지 않네.”
“법률가들은 좋아합니다.”
그럴 것 같았다.
첫 통합회의에는 제국만 참여하지 않았다. 아르칸트. 칼리스테르. 베르단. 하디안. 네리안은 정식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문. 루멘 조정회는 중재자. 세레프도 정보·인과안전 자문으로 일부 참석했다. 바르케시는 옵서버 요청을 받았지만 아리아가 거절했다.
[너무 많은 틀에 동시에 들어가면 독립외교 여지가 줄어듭니다.]
그녀답다.
회의 시작 30분 만에 첫 충돌. 아르칸트는 보호·가입협상 통보의무를 유지하자고 했다. 칼리스테르는 반대.
“우리 주변국과 방위협상하는데 왜 아틀라스와 아르칸트에 알려야 하지.”
사일 렌타 후임정부 대표가 답했다. “귀국도 남동권에 들어오면 같은 위험을 만듭니다.”
칼리스테르.
“우리는 남동협정 당사자가 아니다.”
맞다.
◆제국 입장에서도 칼리스테르 말이 틀리진 않았다. 남동협정은 아틀라스와 아르칸트가 자기 경쟁을 관리하려고 만든 조약이다. 다른 강대국에게 자동으로 적용할 권리는 없다. 마리안이 초안을 지웠다. 대신.
[복수 상위강대국이 동일 정치단위와 보호·가입·장기주둔 협상을 병행하는 경우, 해당 정치단위 동의 아래 상호통보체계를 선택할 수 있다.]
의무. 아님. 선택. 현지국이 결정. 네리안 대표가 바로 찬성했다.
“그게 낫습니다.”
강대국이 자기들끼리 통보할지 말지보다, 현지국이 공개경쟁을 원할지 조용한 협상을 원할지 선택.
두 번째 충돌은 영사접근. 베르단 사건 뒤 6시간 원칙을 루멘 등록표준으로 확대할지. 칼리스테르는 12시간 주장. 군사작전 중에는 6시간도 짧다. 제국은 6. 베르단은 오히려 4시간. 자기들이 한 번 크게 데인 뒤 가장 강경해졌다.
결국 시간 하나로 통일하지 않았다. 생명위험 확인. 즉시. 일반억류. 최대 12시간. 군사작전구역. 6시간 내 최소 생존확인 + 12시간 내 영사접촉. 더 복잡. 하지만 현실적.
세 번째. 자동반격. 제국-칼리스테르는 실제 피격 또는 명확한 탄도위협 전까지 보류. 하디안은 자기 방어체계 특성상 ‘명확한’ 정의가 다름. 루멘은 국가별 자동화 수준까지 하나로 묶는 건 무리라고 했다. 공통원칙만.
[상대국 신호만으로 자동전쟁개시 금지.]
이 정도.
◆회의는 일주일 예정. 3주.
본토 언론은 또 “우주헌법” 같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마리안이 싫어했다.
“헌법 아닙니다.”
루멘도. 아르칸트도. 칼리스테르도. 각자 주권.
정식명칭은 결국 재미없게 나왔다.
[등록권 상호접촉·통상·충돌방지 기본틀.]
사람들은 줄여서. ‘기본틀.’ 그 정도.
서명국도 전부 같은 지위가 아니었다. 루멘 조정회는 관리·중재기관. 아틀라스·아르칸트·칼리스테르·하디안은 참가 강대국·등록국. 베르단은 경계규칙 당사자. 네리안은 독립관찰국. 나중에 누구든 필요한 조항만 가입 가능. 동맹 아니다.
군사상호방위 조항. 없음. 공동적국. 없음. 관세동맹. 없음. 루멘법 우선? 해당 등록사안만.
대신. 핫라인. 영사접근. 중재. 민간항로. 군사통제선. 정치후원. 기본.
누군가 물었다. “이 정도면 너무 약한 것 아닙니까.”
마리안이 답했다. “약해서 여러 나라가 들어올 수 있는 겁니다.”
서명식. 황제 참석? 나는 했다. 왜. 칼리스테르 전쟁조정관. 아르칸트 의장. 루멘 조정대표. 격 맞음.
네리안은 총조정관이 아니라 외교장관만. 자기들은 당사국 아니라며. 정확.
서명 뒤 기자질문.
“이제 루멘권 전쟁은 없어집니까?”
마르 케일이 먼저 말했다. “아니다.”
솔직.
“그럼 무슨 의미.”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안이 말했다. “전쟁 전에 확인할 전화번호가 늘어난 겁니다.”
그 정도.
◆서명 2개월 뒤. 첫 사용. 하디안 자치함대가 제국 보호령 상업항로를 훈련구역으로 잘못 지정. 자동경보. 기본틀 핫라인. 17분. 수정.
예전에도 외교로 풀 수 있었을 일. 이번엔 누구에게 전화할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사건은 기사도 작게.
기본틀 사무국은 루멘 결절 한쪽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했다. 직원 480명. 412개 등록국 규모와 비교하면 작음.
첫날 업무. 전화번호 업데이트. 대표교체. 암호키. 통역코드. 지루.
마리안이 사무실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게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군요.”
벽에는 함대지도 대신 연락망이 걸려 있었다. 국가 이름마다 연결선이 여러 개였다. 아무도 그걸 제국 지도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기본틀 협상에서 의외로 가장 오래 걸린 건 ‘제3정치단위의 선택권’을 실제 문장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강대국은 자기 의무만 쓰면 쉽다. 문제는 아직 회의실에 들어오지도 않은 미래의 작은 국가를 어떻게 조약 안에 넣느냐였다. 네리안 대표가 말했다.
“귀국들이 상호통보를 원한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공개협상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칼리스테르 측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협상은 원래 비공개가 많다.”
아르칸트 대표는 반대했다.
“경쟁강대국이 같은 국가와 동시에 협상 중인데 비공개면 오판위험이 커진다.”
또 맞다. 마리안은 화이트보드에 세 경우를 나눴다. 공개경쟁. 부분공개. 완전비공개. 각 경우 현지국이 무엇을 선택하는지 먼저 적었다. 결국 강대국 통보권보다 현지국의 공개수준 선택권을 앞에 두는 조문이 만들어졌다. 이 작은 순서 때문에 문장 하나가 두 시간 걸렸다.
◆군사대표들은 민간선 긴급구조 조항에서도 충돌했다. 칼리스테르는 대규모 작전권 안에서 구조선을 보내기 전에 현장전쟁조정관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제국은 현장지휘관이 즉시 구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디안은 민간안전기관과 군이 분리돼 있었다. 같은 ‘구조’가 세 나라에서 다른 권한으로 움직였다. 통합조문으로 묶으려다 포기. 대신 결과만 규정했다.
[생명위험 확인 시 해당국 절차와 무관하게 가능한 최단시간 안에 접촉·의료·대피를 개시한다.]
누가 승인하는지는 각국법. 얼마나 빨리 결과가 나와야 하는지만 공동기준.
루멘 조정대표는 이 방식을 좋아했다.
“기능을 통일하고 구조는 통일하지 않는다.”
제국식 보호국 운영과도 닮았다. 마리안이 말했다. “제국은 자치 때문에 그렇게 했고, 여기서는 주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 비슷한 결과.
세레프 자문단은 통신·인과사고 조항을 더 넣으려 했다. 그들의 초안은 84페이지. 사무국 실무진이 19페이지로 줄였다. 세레프 측은 불만이었다.
[위험모형 정확도가 감소.]
레온 하르가 답했다. “아무도 읽지 않으면 정확도는 0입니다.”
세레프 노드가 몇 초 멈췄다.
[과장이나 실무적 의미는 인정.]
회의장에 웃음.
협정 문구가 거의 끝났을 때 베르단이 하나를 추가했다.
[경계변경 및 군사통제선 정보는 민간항로 시스템과 기술적으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마르엔 사건의 흔적. 제국도 즉시 찬성. 칼리스테르는 군사보안 예외를 요구. 결국 공개수준은 다르되, 민간위험 경고 자체는 반드시 같은 원천자료에서 자동생성하도록 했다. 사람이 중간에서 잊을 가능성을 줄인다.
◆서명식 전날 작은 사고가 있었다. 사무국 통역시스템이 칼리스테르의 ‘전쟁조정관’을 ‘전쟁지휘관’으로 번역했다. 정치적으로 미묘하게 다르다. 칼리스테르 측이 바로 수정. 이레나 소르 세대가 만든 원문개념코드 체계 덕분에 3분 만에 확인됐다. 몇십 년 전 ‘불멸’ 오역 때와 비교하면 빠르다. 제도가 다른 제도를 살렸다.
서명식 당일 황제석은 중앙이 아니었다. 루멘 조정대표도. 원형 테이블. 의도. 누가 이 질서를 소유하는지 그림으로 오해하지 않게. 황실 의전원은 처음 불만이었다.
“폐하는 국가원수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끝.
사진이 공개되자 본토 일부는 정말로 불평했다. 황제가 왜 중앙이 아니냐. 칼리스테르 언론에서는 자기 대표가 왜 제국 황제보다 작게 보이냐. 촬영각도. 또.
사무국은 다음 행사부터 공식사진을 정면 하나만 제공하지 않았다. 여러 각도. 쓸데없어 보이는 의전도 국제정치에서는 비용을 줄인다.
기본틀 발효 첫해 사고는 47건. 실제 군사위기 3. 영사접근 11. 항행오류 21. 나머지 통신·절차. 그중 42건은 현장이나 사무국에서 끝났다. 황제에게 올라온 건 2건. 마리안에게는 9건. 나머지는 레온과 실무진.
1년 뒤 나는 사무국 연례보고를 읽었다. 가장 두꺼운 부분은 군사위기가 아니었다. 연락처 변경. 암호키 만료. 담당자 교체. 나는 그 페이지를 넘기려다가 멈췄다. 사람이 바뀌어도 전화가 연결되는 것. 아마 이런 조직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