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ory Box
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179화 — 중재를 믿는 비용

별의 제국 · 179 / 290약 8분0자
지난 화 끝부분 다시 보기

마르엔 사건 뒤 루멘 중재원 이용건수가 크게 늘었다. 아틀라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등록정치단위가 늘었고, 고리망을 통한 교역도 많아졌다. 국경, 광산, 통행료, 인공지능 분기체의 법적 지위 같은 사건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중재원 대기시간도 길어졌다. 작은 국가들이 먼저 불만을 냈다.

“강대국 사건은 빨리 처리되고 우리 사건은 늦습니다.”

루멘은 우선순위가 생명위험과 긴급성에 따라 정해진다고 설명했다. 제도상으로는 맞았다. 그런데 아틀라스나 아르칸트는 수천 명의 법률가와 기술자를 바로 투입해 자료를 완성한다. 작은 국가는 서류를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같은 규칙 아래에서도 준비능력이 다르면 속도가 달라진다.

제국은 중재원 인력확대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법률가와 분석관을 직접 파견하겠다고 했다. 작은 등록국들이 반대했다.

“아틀라스 사람이 아틀라스 사건을 판정하게 됩니까?”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안 바꾸면 된다. 제국은 돈과 기술만 공동기금에 넣고, 인력은 루멘 독립채용으로 돌렸다. 아르칸트와 하디안도 분담. 중재원은 10년 동안 세 배 가까이 커졌다. 평균대기시간은 줄었다. 제국이 돈을 많이 냈다고 판결권이 커진 건 아니었다. 본토 일부 의원이 그 점을 불평했다.

“돈을 내고도 통제하지 못합니까?”

레온 하르가 상원에서 대답했다. “판사를 사려고 돈을 내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이 기사제목이 됐다.

중재제도에 대한 제국 내부 신뢰는 몇 년 뒤 진짜 시험을 받았다. 제국기업과 아르칸트 기업이 같은 외곽 광산권을 두고 충돌했다. 양쪽 모두 자기 등록시점이 먼저라고 주장. 자료가 복잡했다. 최종판정. 아르칸트 기업 승. 제국 기업은 수십 조 크레딧 상당의 예상수익을 잃었다. 황실에 외교항의를 요구했다. 마리안은 거부했다.

“절차에 합의했습니다.”

기업은 상소. 또 패소. 본토 강경파가 루멘 탈퇴를 주장했다. 정작 기업연합 전체는 반대했다. 한 회사가 진 것보다 분쟁을 예측할 수 있는 체계가 더 가치 있었다. 중재가 우리에게 유리할 때만 유효하면 중재가 아니다.

루멘 중재원이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등록 70년째, 직원 한 명이 광업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이 터졌다. 관련 판정 12건이 재심에 들어갔다. 제국 관련 사건도 하나. 본토 언론은 크게 보도했다.

[루멘 질서도 부패.]

맞다. 사람이나 기능개체가 운영하는 조직이니까. 루멘은 해당 직원을 체포했고 감사기록을 공개했다. 재심 결과 제국 관련 판정은 그대로 유지됐다. 황실은 탈퇴나 보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독립감사체계를 강화하자는 개정안에 찬성했다. 재무원은 또 비용이 늘어난다고 한숨을 쉬었다.

레온 하르는 웃으며 말했다. “평화가 비쌉니다.”

재무장관이 물었다. “전쟁보다?”

“아직은요.”

둘 다 웃었다. 농담이 가능한 건 아직 전쟁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마르엔 판결 20주년에는 루멘 법학회가 사례연구를 열었다. 제국 교수와 베르단 교수가 공동발표. 사망자 이름은 모두 익명화. 유족단체가 요구한 방식이었다. 발표 주제는 국경침범이 아니라 긴급영사접근. 마르엔 이후 긴급중재에서 임시명령을 6시간 안에 낼 수 있게 된 변화. 다른 등록국 민간선 사고에서 이 제도 덕분에 의료접근이 11시간 빨라진 사례도 소개됐다. 언론은 ‘63명의 희생이 다른 생명을 살렸다’고 쓰려 했다.

유족 일부가 항의했다. 제목이 바뀌었다. 제국 정부는 아무 논평도 하지 않았다.

중재를 믿는다는 건 원하는 판결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보호국 기업이 외국 환경단체와 벌인 분쟁에서도 제국 쪽이 졌다. 보호국 정부는 황실에 판정무효를 요청했다. 거부. 등록협정에 우리가 들어갔다. 규칙도 우리가 서명했다.

그래도 중재가 지나치게 느릴 때는 압박했다. 판사가 이상하면 감사 요구. 규칙이 낡으면 개정. 복종과 참여는 달랐다. 몇십 년 동안 제국 외교원은 그 차이를 배웠다.

그 무렵 루멘 분쟁경계에서 새로운 긴급통지가 들어왔다. 법률문서가 아니었다. 군사이동 경보. 베르단이 별도채널로 먼저 알려왔다.

[북동측 등록주권단위 대함대 이동 확인.]

레온이 지도를 열었다. 함선 수는 아직 추정치. 수십만. 그 선을 따라 이동하는 방향 근처에 작은 표시 하나가 있었다. 제국 민간탐사선. 연락두절.

상황실에 아델라인과 라울이 들어왔다. 마리안도. 이번에는 중재원 판례부터 펼칠 일이 아니었다. 먼저 알아야 했다. 누가 움직이고 있는지. 왜 우리 탐사선이 그 안에 있는지.

중재원 확장 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작은 국가들의 사건이었다. 과거에는 서류준비만 몇 달 걸리던 나라가 공용법률지원팀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사건을 대신 이겨주는 조직은 아니었다. 쟁점을 정리하고 필요한 자료를 맞춰주는 역할. 제국 법무원 일부는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왜 남의 소송 준비까지 우리가 돈을 냅니까?”

레온 하르가 답했다. “우리 사건만 빨리 처리되면 중재원 신뢰가 무너집니다.”

결국 유지.

첫해 성과보고서를 보니 작은 등록국 사건 평균접수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본토 언론은 거의 관심 없었다. 좋은 제도 변화 상당수는 뉴스가 안 된다.

반대로 제국 기업이 패소한 광산권 사건은 몇 달 동안 기사였다. 회사 대표는 상원 청문회에서 말했다. “루멘 판정이 아르칸트에 편향됐습니다.”

자료 요청. 편향증거? 없음. 패소.

기업 주가가 떨어지고 소송비용도 컸다. 그렇다고 국가가 판정 뒤집기 위해 함대 보내는 건 말이 안 된다. 상원 일부 의원도 결국 그 점에서 물러났다.

중재원 부패사건은 더 위험했다. 뇌물 받은 직원이 단독으로 판결을 결정한 건 아니었지만, 내부자료 접근권을 돈 받고 넘겼다. 등록국들 반발. 루멘은 사건을 숨기지 않았다. 관련 기록 공개. 감사위원회 확대. 직원 자산신고. 일부는 과도하다고 반대.

제국 대표단은 투명성 강화에 찬성하면서도 모든 직원의 민간거래 내역까지 공개하는 건 반대했다. 개인권. 또 균형.

최종개정안은 고위험 직위만 자산신고. 사적통신 전면감시는 안 함.

부패사건 몇 년 뒤 감사체계가 안정되자 중재원 신뢰도도 회복됐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고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

마르엔 사건 유족 일부는 중재원 행사에 초대받지 않기를 원했다.

“또 우리 가족 이야기로 제도홍보하지 마십시오.”

요청 반영.

다른 유족은 참여. 입장 다름.

메린 사아는 끝까지 공식행사에 안 나왔다. 그 선택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루멘 법학회는 마르엔 판례를 숫자로만 부르기 시작했다.

[경계·영사 4421호.]

사건명이 사라지자 법률가에게는 다루기 쉬웠다. 유족 일부는 차라리 좋다고 했다. 자기 가족 이름이 매번 불리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사건이 사람의 기억과 제도의 기억에서 서로 다른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

중재원 긴급임시명령 6시간 규칙이 실제로 효과를 본 사례도 있었다. 두 등록국 민간선이 국경근처에서 충돌. 한쪽이 선박을 압수. 생명유지 이상. 3시간 만에 의료접근. 사망 0. 언론은 ‘마르엔 판례 효과’라고 제목을 달았다. 유족단체가 또 불쾌해했다. 다음 보도부터는 판례번호를 쓰는 매체가 늘었다.

제국 외교원도 내부교육에서 사건 이름 대신 조건을 가르쳤다. 경계변경 통지. 영사접촉. 생명위험. 군사개입.

사람 이름은 추모기록에서. 정책은 정책문서에서. 구분.

그 무렵 베르단 국경 밖에서 움직이던 거대함대가 더 선명하게 잡혔다. 수십만 척. 그리고 그 이동축 근처에서 제국 민간탐사선 《머나먼 등불》이 사라졌다. 중재원도 긴급채널을 열었다. 이번에는 법률문제와 군사문제가 동시에 들어왔다.

레온 하르가 상황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중재요청 먼저 넣겠습니다.”

아델라인은 함대배치부터 보고 있었다. 마리안은 상대국 식별자료를 요청했다. 각자 자기 방식.

나는 세 화면을 동시에 봤다. 마르엔 사건과 비슷해 보이는 점. 다른 점.

연락두절. 외국 경계. 민간선. 여기까지는 비슷. 그 뒤. 상대 함대 41만. 비공개 군사작전. 영유권선도 아니라 임시통제선. 완전히 다름.

세라가 상황표 첫 줄에 붙인 문장을 읽었다. [동일시하지 말 것.]

이번에는 내가 지우지 않았다.

중재제도는 시간을 사준다. 함대도 시간을 산다. 외교도. 문제는 그 시간을 무엇에 쓰느냐. 상황실에서 누구도 그걸 문장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각자 자료를 더 가져왔다.

중재원 개혁 뒤 레온 하르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중재는 승리하는 곳이 아니라, 패배해도 함대를 안 보내는 곳입니다.”

그 말은 너무 잘 정리돼 있어서 외교학교 교재에 들어갔다. 레온 본인은 나중에 부끄러워했다.

“제가 저런 말을 했습니까?”

기록이 있었다.

몇 년 뒤 제국이 또 하나의 큰 분쟁에서 패소했을 때 젊은 외교관이 그 문장을 인용했다. 레온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판결문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라고 했다. 격언보다 사실관계가 먼저였다.

루멘 중재원 긴급채널이 이번 칼리스테르 사건에서도 열리면서, 마르엔 때 만들어진 절차가 자동으로 작동했다. 누가 특별지시하지 않아도 영사접촉·임시봉인·군사정보 분리가 동시에 시작됐다. 제도는 사람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 덕분에 상황실은 함대 숫자를 보는 데 시간을 더 쓸 수 있었다. 아델라인은 법률자료를 건너뛰고 함대배치부터 봤다. 레온은 반대로 군함 수보다 상대국의 중재가입 조항을 먼저 열었다. 같은 상황실에서 서로 다른 위험을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상황실 시계만 계속 갔다. 아직은 기다렸다. 계속.

중재원 예산은 이후에도 매번 논쟁거리였다.

어떤 해에는 너무 비싸다고 깎였고, 큰 분쟁이 터진 다음 해에는 다시 늘었다.

완벽한 규모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등록국들은 없애자는 쪽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다.

불편한 제도였지만, 없는 상태를 이미 여러 번 상상해봤기 때문이다.

레온 하르는 다음 예산심사에도 같은 자료를 들고 갔다. 의원들은 또 비싸다고 했고, 결국 또 통과시켰다.

중재원 유지비는 결국 제국 외교예산의 평범한 고정항목이 됐다.

누구도 더 이상 그 항목을 조공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END OF CHAPTER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

다음 화

읽는 흐름을 끊지 않고 바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읽던 위치를 저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