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58화 — 서른한 개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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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이 넘긴 대단절 고기록은 생각보다 짧았다.
관리질의 31개.
각 항목은 한두 줄뿐이었다.
그런데 첫 네 줄부터 제국 기록과 너무 비슷했다.
[정치단위 연속성.]
[핵심영역 귀속.]
[보호관계.]
[지성개체 분류.]
세라가 네 번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우리 기록의 ‘외부 재분류’와 닮았습니다.”
오르테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량을 보는 질의가 아닙니다. 관계를 읽는 쪽에 가깝습니다.”
◆31번째 질문은 더 불편했다.
[보존대상 조건 충족 여부.]
‘보존.’
대단절 직전 제국 로그에서 발견한 미확인 외부 프로토콜의 해석과 겹쳤다.
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루멘은 이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대?”
에일린이 자료를 넘겼다.
“기록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의미를 해석한 건 최근입니다. 우리 자료와 비교하면서 일치도가 올라갔습니다.”
루멘도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제공한 과거 사례는 일곱 건.
모두 관리질의 뒤 경계단절이나 재설정이 발생했다.
그중 네 곳은 정치단위 일부가 살아남았다. 두 곳은 수십~수백 년 뒤 다른 고리권에서 재발견됐다. 한 곳은 지금까지 미확인.
완전소멸이 확인된 사례는 없었다.
“흩어진 거네.”
내가 말하자 세라는 자료에 표시했다.
우리의 인과파편 가설과 잘 맞았다.
◆한 사례는 더 자세했다.
19개 성계 연합.
관리질의 후 6개만 원래 위치에 남았다.
나머지 13개는 147년 뒤 세 곳의 서로 다른 경계권역에서 발견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각 파편정부가 자신이 원래 국가의 정통정부라고 주장했다.
셋이 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루멘 중재에도 불구하고 짧은 전쟁까지 났다.
결국 연방형 재통합.
◆세라가 말했다.
“카엘 본국을 찾으면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겠군요.”
세렌 릴레이 왕실대표.
현재 카엘 본국정부.
둘 다 살아 있다면.
누가 정통인가.
우리가 만든 ‘자동복구 금지’ 원칙이 갑자기 더 중요해졌다.
◆12번째 질문은 뜻 자체가 불분명했다.
[관찰자 연속성.]
오르테가는 처음에 관측장치 상태를 뜻한다고 봤다.
루멘 원문을 다시 받아보니 달랐다.
우리가 ‘관찰자’라고 번역한 단어는 단수인지 복수인지, 존재인지 체계인지, 역할인지조차 문법상 확정되지 않았다.
번역원 주석이 길어졌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과거 게임이라고 믿었던 표시체계가 떠올랐다.
세력.
영역.
인구.
보호.
언제나 세계를 ‘누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화면.
◆“가설 하나 추가.”
제0분석실장이 기다렸다.
“표시체계와 관리질의가 같은 상위정보구조를 참조했을 가능성.”
오르테가가 바로 물었다.
“근거는?”
“형식이 닮았어.”
“약합니다.”
“알아.”
에일린은 우선순위를 낮게 적었다.
황제가 말한 가설이라고 높게 둘 이유는 없었다.
◆내 개인기록에는 한 줄을 더 썼다.
[관찰자 = 나일 가능성?]
쓰고 나서 한참 봤다.
너무 쉽게 맞아떨어지는 가설은 위험하다.
현재 자료를 과거 기억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걸 수도 있었다.
며칠 뒤 우선순위를 한 단계 내렸다.
◆루멘 사례 중 하나에서는 정치단위가 사라진 뒤에도 ‘관찰자 연속성’ 질의에 응답이 계속됐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국가는 끊겼는데 어떤 관측주체는 남았다는 건가.
고리망이 스스로 응답했나.
생존자가 있었나.
◆제0분석실 벽에 31개 질문을 전부 띄웠다.
연구자들은 번호로 부르기 시작했다.
12번은 ‘관찰자.’
31번은 ‘보존.’
7번은 의미가 너무 불분명해서 그냥 ‘일곱.’
공식문서에는 별명을 쓰지 않았다.
◆새 연구원 하나가 31번 앞에서 물었다.
“보존 대상이 제국이라면 왜 외부권 시민을 버렸습니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옆 연구원이 말했다.
“그래서 제국이 아닐 수도 있죠.”
가설표가 다시 열렸다.
보존대상이 본토인지.
아틀라스 종족인지.
행정핵심인지.
특정 관찰자와 연결된 사회인지.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다.
◆반증전담팀도 따로 만들었다.
‘아틀라스 핵심사회를 보존하려 한 사건’이라는 가설만 반박하는 자료를 찾게 했다.
1년 뒤 몇 가지가 나왔다.
본토의 아틀라스 군사시설 일부도 사라졌다.
외부권 아틀라스인 일부는 세렌 릴레이처럼 살아남았다.
본토 비아틀라스 비지성동물은 남았다.
반면 비아틀라스 완전시민은 본토에서 사라졌다.
법적 시민권만으로도, 종족만으로도 설명이 안 됐다.
◆관리질의는 누군가가 ‘물질’을 보기 전에 ‘관계’를 읽은 흔적처럼 보였다.
본토.
아틀라스.
보호관계.
지성.
어느 쪽이 핵심인지 아직 몰랐다.
오르테가는 한숨을 쉬었다.
“정보가 늘수록 모르는 게 늘어납니다.”
세라가 말했다.
“연구가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오르테가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제0분석실에 혼자 남았다.
31개 질문이 벽에 떠 있었다.
화면 한쪽에는 오래된 표시체계 기록.
다른 한쪽에는 루멘 고기록.
비슷한 단어들.
비슷하지 않은 구조들.
서로 겹쳤다가 어긋났다.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두 화면을 모두 껐다.
어둠 속에서도 31번 질문의 문장만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31개의 질의는 외부 연구자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일부만.
대단절 생존자 가족들은 왜 숨기느냐고 물었다.
정상적인 반응.
◆복원항로국은 공개 가능한 다섯 항목을 설명회에서 발표했다.
[정치단위 연속성.]
[경계귀속.]
[보호관계.]
[지성개체 분류.]
그리고 관리질의가 물리단절 전에 있었다는 사실.
‘보존’이라는 표현은 아직 비공개.
◆시아 렌은 발표를 맡으면서 황실에 요구했다.
“확정된 것처럼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대단절이 누군가의 보존행위였다고도.”
“그래.”
◆설명회 뒤 가족들은 더 많은 질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희망을 얻었다.
“다른 사례도 살아남았다면 우리 가족도.”
어떤 사람은 화를 냈다.
“33년이나 이걸 모르고 있었습니까?”
몰랐다.
◆황실이 가진 비밀이 늘어날수록 공개시점도 정치문제가 된다.
너무 빨리 내놓으면 오해.
너무 늦으면 은폐.
정답 없음.
◆몇 년 뒤 루멘에서 여덟 번째 유사사례가 발견됐다.
이번에는 관리질의가 발생했지만 큰 단절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요.
질의 자체가 사건원인이라는 가설이 약해졌다.
◆오르테가는 오히려 좋아했다.
“좋습니다.”
“왜.”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반증이니까요.”
과학자는 자기 가설이 깨지는 걸 좋아할 때도 있다.
◆새 사례를 넣자 그림이 바뀌었다.
관리질의가 ‘발사버튼’이 아니라 사건 전 검사나 상태확인일 가능성.
누군가 곧 일어날 일을 알고 확인했나.
혹은 어떤 자동체계가 위험을 감지했나.
◆31개의 질문은 더 이상 명령문처럼만 보이지 않았다.
점검표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누가 점검했고, 무엇을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했는가.
질문은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더 커졌다.
◆제0분석실 연구자들은 31개 질문 옆에 새 칸을 만들었다.
[질의 후 사건 발생 여부.]
처음에는 7/7.
나중에는 7/8.
언젠가 더 내려갈 수도 있다.
◆숫자가 바뀔 때마다 가설순위가 움직였다.
벽은 몇십 년 동안 같은 질문을 띄웠지만, 그 옆의 답은 계속 바뀌었다.
◆제0분석실은 루멘 고기록만 믿지 않기 위해 독립검증도 시작했다.
고리망 밖에서 비슷한 사건 흔적이 있는지.
세레프 인과관측자료.
메르탄 위상항로 로그.
바르케시 고대전쟁기록.
전부.
◆바르케시 자료에서 아주 오래된 이상기록 하나가 나왔다.
전쟁 중 성계 하나가 통신망에서 사라졌다가 18년 뒤 다른 좌표관계에서 관측된 사건.
당시에는 전쟁혼란과 관측오류로 처리.
지금 보면.
인과파편 가능성.
◆아리아가 자료공개를 허용했다.
“우리 조상 실수기록까지 가져가는군요.”
“도움 되잖아.”
“그렇긴 합니다.”
◆이 사건에는 관리질의 기록이 없었다.
또 반증.
◆따라서 관리질의는 모든 인과단절의 필수조건도 아니다.
제0분석실 가설표가 더 복잡해졌다.
오르테가는 좋아했고, 세라는 싫어했다.
“표가 한 장 더 늘었습니다.”
“진실이 단순하다고 약속한 적 없습니다.”
그 말은 오르테가답게 들렸다.
◆내 개인 표시체계와의 연결가설도 우선순위가 오르내렸다.
어떤 날은 너무 닮아 보였고, 어떤 날은 전혀 다른 구조처럼 보였다.
나는 그 변화를 기록했다.
확신의 역사도 자료가 될 수 있다.
◆몇십 년 뒤 누군가 제0분석실 파일을 열면, 황제가 어느 시점에 무엇을 믿었는지도 볼 수 있게.
정답만 남기면 판단과정이 사라진다.
그건 원하지 않았다.
◆31개의 질문을 연구하는 동안 가장 오래 싸운 건 과학자와 법률가였다.
‘정치단위’가 물리적으로 무엇인지.
국경선인가.
행정망인가.
시민들의 상호인식인가.
황제가 존재하는가.
◆한 법학자는 말했다.
“국가는 법적 관계입니다.”
오르테가는 반박했다.
“물리현상이 법전을 읽는다는 말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자료가 그 비슷한 걸 보여주지 않습니까.”
회의가 길어졌다.
◆세레프 연구자가 중간에 다른 표현을 제안했다.
‘정보적으로 안정된 관계집합.’
법학자는 싫어했고, 과학자는 덜 싫어했다.
결국 임시용어로 채택.
◆이 용어 덕분에 보호국·시민권·본토 같은 분류를 물리현상과 연결해 생각할 틀이 조금 생겼다.
정답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 다른 학문이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제0분석실의 가장 큰 성과가 거대한 발견이 아니라 공통어 하나였던 해도 있었다.
그해 벽의 31개 질문은 그대로였다.
누구도 그 공통어를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음 회의부터 논쟁시간은 확실히 줄었다.
질문은 줄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모르는지는 전보다 훨씬 정확해졌다.
벽의 질문들은 그대로였고, 연구자들만 몇 번 바뀌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