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56화 — 황제가 없는 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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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우렐리움을 떠난 지 열흘째, 황궁에서는 은행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성계거래소의 핵심 정산기관이 루멘 등록 관련 상품을 담보로 너무 많이 받아놓았다. 시장이 흔들리자 담보가치가 급락했고, 다른 은행들이 단기자금을 빌려주지 않기 시작했다.
정산기관 자체가 당장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결제망이었다.
◆재상 아우구스트 렌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세라.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나이아.
황제는 없었다.
재무장관이 먼저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폐하 재가를 받는 편이 안전합니다.”
세라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법적으로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그럼 연락하지 마십시오.”
중앙은행은 우량담보에 한해 긴급유동성을 공급하고 금리를 높게 잡았다. 주주배당은 정지. 부실 루멘 관련 상품은 담보에서 제외.
하르모스와 별값 폭락 때 이미 한 번 만든 방식이었다.
결정까지 45분.
시장 개장 전에 창구가 열렸다.
주가는 폭락했지만 결제망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루멘 접촉지점에서 사건이 끝난 뒤 보고를 받았다.
“왜 연락 안 했어?”
세라가 대답했다.
“연락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 출장 중인데.”
“그래서 더더욱요.”
마리안이 옆에서 웃었다.
“비서실이 성공한 거 아닙니까?”
맞았다.
그래도 조금 섭섭했다.
◆같은 기간 로하르 정식령에서는 교육과정 분쟁이 있었다.
지역교육청이 제국 공통과목 확대 때문에 로하르 역사수업이 줄어든다며 중앙교육부 지침 일부를 거부했다.
예전 같으면 세리아가 황궁까지 들고 왔을 문제였다.
이번에는 지역법원에서 끝났다.
판결.
중앙 최소과목시간은 지킨다.
그 외 시간은 지역자율.
로하르 쪽 승소.
교육부는 항소하지 않았다.
세리아가 하원에서 말했다.
“황제가 없어도 제국이 귀찮게 굴긴 하는군요.”
회의장이 웃었다.
◆황궁 내부에서는 나이아가 더 바빠졌다.
세라가 몇십 년 동안 넘겨온 일정·행정권한을 실제로 혼자 처리해야 했다.
한 장관이 황제 부재 중 미뤄둔 인사안을 빨리 통과시키려 했다.
“폐하 결재가 필요 없는 인사입니다.”
나이아가 서류를 돌려줬다.
“그래서 더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황제 결재가 없으면 절차자료가 더 완벽해야 합니다. 경력검증 하나가 빠졌습니다.”
장관은 말없이 가져갔다.
세라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배가 알아서 처리했다.
◆근위도 비슷했다.
카시안이 황제함에 타고 나가면서 부사령관이 황궁보안을 맡았다.
첫 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
둘째 주 외국대표단 행사에서 잘못된 위협정보를 믿고 이동통로를 40분 폐쇄했다. 외교원이 항의했고, 부사령관은 징계를 받았다.
카시안이 귀환한 뒤 그를 자르지 않았다.
“왜 그렇게 판단했지?”
잘못된 위험등급.
정보전달 절차.
훈련.
수정.
후임에게 맡기면 후임도 실패한다.
그 실패를 견디지 못하면 영원히 맡길 수 없다.
◆황제 부재를 이용해 황제직통 민원을 넣는 사람도 늘었다.
황궁 식자재 입찰에서 탈락한 회사 대표가 비서실에 요구했다.
“폐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계약을 보류해주십시오.”
나이아가 물었다.
“왜요?”
“폐하 계실 때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입찰결과와 폐하 재실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보류 안 함.
◆나중에 기록을 읽고 내가 웃었다.
“내가 있으면 음식회사도 살려줘?”
세라 표정은 진지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 사건 뒤 황제직통 민원분류가 바뀌었다.
황제 고유권한이나 전략예외가 아니면 일반부처로 자동이관. 황제에게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우선순위가 오르지 않는다.
시민 일부는 “황제가 목소리를 안 듣는다”고 불평했다.
처리통계는 반대였다.
민원접수량은 그대로인데 해결시간은 줄었다.
방송 인터뷰에 나온 시민 하나가 말했다.
“황제가 안 봐도 해결되면 그게 낫죠.”
옆 사람은 말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보고 싶습니다.”
상징과 행정은 같은 게 아니었다.
◆루멘 등록예산도 황제 없이 상원에 올라갔다.
상원 150표 가운데 재상과 12장관은 13표뿐이었다. 외교원은 세라티 상주대표부를 크게 시작하려 했고, 예산위원회는 과하다고 봤다.
8퍼센트 삭감.
마리안이 원격으로 불만을 냈다.
“필요한 인력입니다.”
상원은 2년 뒤 증원심사를 다시 하라고 했다.
내가 재가를 거부하면 예산전체를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
2년 뒤 실제 업무량 자료가 쌓였다.
인력 부족.
상원이 증원을 승인했다.
처음부터 밀어붙였으면 빨랐을 일이다.
대신 의회가 자기 판단으로 확인했다.
◆출장이 길어지면서 내게 올라오는 결재도 줄었다.
어느 날 업무요약 82건 중 황제판단이 필요한 건 세 건뿐이었다.
전략기술 수출.
보호령 지위변경.
제0분석실 최고기밀.
나머지는 이미 처리.
내가 세라에게 통신했다.
“제국이 나 없어도 잘 굴러가네.”
“예.”
대답이 너무 빨랐다.
“기분 나쁘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세라가 두 번째 장기휴가를 갔을 때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나이아가 대행했다.
“세라 없어?”
“휴가입니다.”
“또?”
“5년 지났습니다.”
시간감각.
내가 웃었다.
세라가 돌아온 뒤 말했다.
“이번엔 제 부재 중 처리건수가 더 많았습니다.”
자랑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분명 자랑이었다.
◆황궁 업무보고에서 세라 이름이 없는 문서가 절반을 넘기 시작했다.
나이아는 회의를 더 짧게 했고, 다른 부비서장은 현장방문을 늘렸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지?”
“많습니다.”
“그런데 왜 안 고쳐?”
“후임자를 만든 것이지 복제본을 만든 게 아니니까요.”
그 답은 마음에 들었다.
◆출장 중 어느 밤, 나이아가 장관 셋을 상대하는 회의녹화를 틀어봤다.
“그 사안은 이미 결론났습니다. 다음.”
장관 하나가 말을 더 하려 하자 그녀가 서류를 덮었다.
세라보다 거침없었다.
영상을 세라에게 보내며 썼다.
[자네보다 무서운데.]
답이 왔다.
[성공입니다.]
영상 속 회의에서는 그 뒤 아무도 황제를 찾지 않았다.
◆황제가 없는 동안 재상도 한 번 실수했다.
외부권역 항만세 조정안을 너무 빨리 승인한 것.
숫자상으로는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남방연합 물류업체와 기존 장기계약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아 몇몇 항로가 이중부담을 맞았다.
시장 반발이 시작되자 재상은 내 귀환을 기다리지 않았다.
승인 9일 뒤, 자기 명의로 시행을 정지하고 재검토에 들어갔다.
하원 질의에서 의원이 물었다.
“왜 처음에 못 봤습니까?”
아우구스트 렌은 길게 변명하지 않았다.
“계약전환비용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고의나 부패는 없었다. 담당차관도 같이 책임을 인정했다.
새 조정안에서는 세율이 조금 낮아지고 전환기간이 길어졌다. 남방업체는 수용했다.
내가 귀환해 보고를 받고 물었다.
“내가 있었으면 안 틀렸을까?”
세라가 대답했다.
“모릅니다.”
황제가 있다고 오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있었다면 장관들이 ‘폐하 판단을 받자’며 더 오래 미뤘을 수도 있었다.
◆황실 권한표에는 새 항목이 추가됐다.
[상급자에게 올리는 것이 책임회피의 사유가 될 수 없음.]
자기 권한 안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을 괜히 황제에게 올려 시간을 버리면 인사평가에 반영한다.
관료들은 싫어했다.
첫해에는 결재요청이 급감했다. 둘째 해에는 조금 다시 늘었다.
적정선이 생겼다.
◆나이아는 이 제도를 너무 공격적으로 적용해 한 번 사고를 낼 뻔했다.
전략광물 수출승인을 장관권한으로 처리했는데, 실제 품목은 군사파생 가능성이 높아 황제 심사대상이었다.
감사에서 수출 전에 발견됐다.
피해는 없었다.
나이아는 자기 실수라고 보고했다.
“빨리 내리려다 경계를 넘었습니다.”
세라는 대신 덮지 않았다.
인사감점.
절차수정.
내가 물었다.
“너무 세게 감점한 거 아냐?”
“후계자를 키우는 것과 후계자를 보호하는 건 다릅니다.”
나이아도 이의 제기하지 않았다.
몇 년 뒤 그 실수는 비서실 교육사례가 됐다.
◆황제 부재 국정이 안정되자 해외방문도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다. 나는 루멘권 협상 때문에 몇 달씩 외부에 머무는 일이 생겼다.
시민 반응은 생각보다 작았다.
황제가 어디 있든 세금은 빠져나가고, 학교는 열리고, 도시철도는 지연됐다.
아우렐리움 도심철도 공사는 내가 없는 동안 지반문제로 8개월 늦었다.
시민들은 황실보다 도시청을 더 많이 욕했다.
세라가 민원통계를 보여줬다.
황제관련 민원은 줄고, 도시행정 민원은 늘었다.
“좋은 거야?”
“제 생각엔요.”
◆귀환한 달에도 열차 평균지연은 4분 12초였다.
환영함대가 수도궤도에 떠 있는 동안 시민 대부분은 출근열차 안에서 그 장면을 보지도 못했다.
◆황궁 부재훈련은 이후 정기화됐다.
매 10년마다 하루는 황제·재상·수석비서관·근위사령관이 동시에 연락불능인 상황을 가정했다. 실제 전쟁이나 암살을 흉내내기보다, 누가 어떤 권한을 자동승계하는지 확인하는 훈련이었다.
첫 훈련에서 의외로 가장 오래 멈춘 건 군이 아니라 황실재산청이었다. 결재권자 부재 시 임대계약 갱신 절차가 없었다.
세라는 결과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제국은 살아남는데 상가계약이 죽는군요.”
다음 훈련에서는 고쳐졌다.
◆황궁 부재훈련은 이후 10년마다 반복됐다. 어느 해에는 황제·재상·수석비서관·근위사령관이 동시에 연락불능이라는 조건까지 걸었다.
첫 훈련에서 가장 오래 멈춘 건 군사작전이 아니라 황실재산청의 임대계약 갱신이었다.
세라가 결과표를 보고 말했다.
“제국은 살아남는데 상가계약이 죽는군요.”
다음 훈련에서는 그 절차도 자동승계됐다.
◆나이아는 그 뒤에도 몇 번 틀렸다. 대신 황제에게 올릴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간은 줄었다.
세라는 그걸 더 중요하게 봤다.
실수 없는 후계자가 아니라, 자기 판단을 하는 후계자.
황궁은 조금씩 그런 사람을 늘려갔다.
황제 부재는 더 이상 비상상황이 아니라 운영조건 하나가 됐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