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53화 — 루멘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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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둘째 날 네마르-6이 거주결절 방문을 제안했다.
마리안이 먼저 확인했다.
“공식 시찰입니까?”
“관찰.”
“관광과 차이가 있습니까?”
“귀측이 결정.”
결국 황제함 한 척과 호위함 열두 척만 움직였다. 나머지 함대는 접촉지점에 남았다. 카시안은 끝까지 호위수를 늘리려 했지만, 도시를 보러 가면서 전투대형을 만드는 편이 더 이상했다.
등록협정 뒤 황실함이 고리망을 직접 이용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통과시간은 체감상 6초.
항법계는 14초를 기록했다.
밖으로 나오자 도시가 아니라 별이 먼저 보였다.
◆백색왜성 하나를 수백 개의 얇은 띠가 둘러싸고 있었다. 각각의 띠에는 주거구역과 농업시설, 공장, 교통망이 이어졌다. 행성 하나에 도시를 만든 게 아니라 항성계 전체를 거대한 도시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세라티 결절.]
상주 생물개체 환산 약 470억.
분산개체는 별도.
오르테가가 조용해졌다.
그가 말이 없을 때는 정말 놀란 것이다.
◆그런데 거리로 내려가자 분위기는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
출근하는 사람.
시장.
학교.
수리 중인 외벽.
폐업한 가게.
루멘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은 형태가 제각각이었다. 액체가 든 투명용기 안에서 이동하는 종족이 있었고, 하나의 지성이 여러 기계몸을 번갈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두 팔 생물도 드물지 않았다.
“모두 같은 법을 적용받습니까?”
마리안 질문에 네마르-6은 되물었다.
“어떤 법.”
상업법은 관리권역 공통.
형사기준은 최소선만 공통.
가족과 상속은 각 등록정치단위.
신체권은 개체형태에 따라 다시 달랐다.
제국도 복잡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더했다.
◆카시안은 정치체제보다 보안부터 봤다.
거리에는 경찰처럼 보이는 무장인력이 거의 없었다.
“보안이 안 보입니다.”
“보이지 않을 필요가 있다.”
네마르-6의 답.
카시안은 더 싫어했다.
교통수단을 탈 때도 둘의 의견이 갈렸다. 근위는 중앙통로가 가장 통제하기 쉽다고 했지만, 루멘 쪽은 중앙이 가장 혼잡하다고 했다.
결국 저속 일반통로를 이용했다.
앞뒤 몇 칸만 비우고 옆 차량에는 현지 시민들이 그대로 탔다.
사람들이 우리를 찍었다.
어떤 사람은 관심도 없었다.
아우렐리움에서 황제가 움직일 때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시장에서는 가격표가 세 종류였다.
에너지.
시간.
정보.
어떤 물건은 통화보다 제작슬롯을 거래했고, 어떤 서비스는 특정 데이터 접근권으로 값을 냈다.
나는 고리 모양의 작은 장식을 하나 집었다.
진짜 고리재료는 아니었다.
어디나 기념품은 있다.
상점주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아니면 알아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아틀라스에서 왔습니까?”
“응.”
“새 등록국.”
그게 끝이었다.
아우렐리움에서는 내 얼굴을 모르는 성인을 찾기 어렵다. 여기서는 그냥 외국인 하나였다.
조금 편했다.
◆교육구역을 지나는데 작은 개체들이 우리를 보고 몰려왔다. 아이인지 학생단계의 다른 무언가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중 하나가 갑자기 형태를 바꿨다.
두 팔.
두 다리.
얼굴 비슷한 돌출부.
아틀라스인을 흉내낸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웃음 같은 진동이 터졌다.
카시안이 긴장했다.
마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나갔다.
문화적 실례인지 놀이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결절 한쪽에서는 관리회비 인상 반대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카시안은 동선을 바꾸자고 했지만 네마르-6은 위험정보가 없다고 답했다.
시위대는 우리가 지나가자 표식판 몇 개를 들었다.
[아틀라스 때문에 회비가 오르면 돌려보내라.]
마리안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우리 때문에 오릅니까?”
“분담식 재산정 중.”
아직 결정도 안 됐는데 정치가 먼저 움직였다.
한 시위자가 앞으로 나와 얇은 자료판 하나를 내밀었다. 근위가 막으려 했지만 무기는 아니었다.
[귀측 등록이 원인변수 중 하나.]
마리안이 자료를 받았다.
몇 년 뒤 제국이 루멘 회비계산식을 문제 삼을 때, 그 시위대 자료가 실제로 참고자료 중 하나가 됐다.
◆거주결절에는 낙후된 구역도 있었다.
제국 기준으로 절대빈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라티 평균과 비교하면 오래된 설비와 작은 공용주거가 많았다.
“왜 차이가 나지?”
네마르-6은 숨기지 않았다.
“이주집단의 자산축적 차이. 기능시장 변화. 교육격차.”
익숙한 이유였다.
기본에너지와 최저주거, 치료는 보장됐지만 부의 차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기술이 높다고 사회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일정은 공공기록관이었다.
유물보다 결정기록이 많았다. 오래된 분쟁, 통행료 조정, 실패한 관리정책까지 공개범위 안에서 남아 있었다.
마리안이 380년 전 기록 하나를 읽다가 멈췄다.
어느 등록국이 고리망 요금을 두고 탈퇴했다가 14년 뒤 다시 가입한 사건.
“체면은 없군요.”
기록관 담당자가 답했다.
“체면의 정의가 필요하다.”
마리안이 웃었다.
◆황제함으로 돌아온 뒤 카시안은 보안보고부터 올렸다.
“도시에서 우리를 향한 민간촬영 신호가 2천 건 이상이었습니다.”
“사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몇 시간 뒤 루멘 사회망에 사진 하나가 돌았다.
고리 기념품을 든 아틀라스 황제.
제목.
[새 등록국 지도자가 환전 절차를 몰랐다.]
아우렐리움에서도 그대로 퍼졌다.
세라에게 메시지가 왔다.
[외교성과보다 조회수가 높습니다.]
나는 기념품을 집무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며칠 뒤에는 대중관광지도도 벽에 붙였다. 73개 등록정치단위가 수십 색으로 얽혀 있었다.
세라가 사진을 보고 답했다.
[벽 정리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정치평가가 아니라 인테리어였다.
◆세라티 결절의 생활비는 아우렐리움보다 높았다.
특히 공간.
항성을 둘러싼 구조물이라고 해도 무한하지 않았다. 오래된 중심링의 주거권은 비쌌고, 외곽링은 싸지만 통근시간이 길었다.
마리안은 현지 주택자료를 보다가 웃었다.
“결국 집값이군요.”
네마르-6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가가 설명하자 답했다.
“거주공간 배분갈등은 다수 결절에 존재.”
우주문명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한 낙후링에서는 재개발 반대표식이 붙어 있었다.
관리권역은 노후시설을 철거하고 새 거주구를 만들려 했지만 기존 주민들은 임대료가 오를 걸 걱정했다.
제국 수행원 중 도시행정관 하나가 너무 자세히 보자 현지 주민이 물었다.
“귀국에서는 해결했습니까?”
행정관은 웃었다.
“아니요.”
상대도 웃는 방식 비슷한 신호를 냈다.
◆외교방문 중 작은 응급상황도 있었다.
제국 수행원 한 명이 현지 식품향 성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직접 먹지도 않았고 공기 중 미량물질 때문이었다.
루멘 의료체계는 그의 생리를 처음 보는 상태였다.
제국 의료진과 현지 의료기능체계가 자료를 주고받았다.
12분 뒤 증상 안정.
큰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양측은 외교시설 공기규격을 새로 만들었다.
다종족 외교는 회담문구보다 환기장치가 먼저 실패할 수도 있었다.
◆시장에 들어간 벨로아 보험회사는 바로 이 사건을 상품설계에 반영했다.
‘다종족 방문객 의료보장.’
루멘 사람들은 처음엔 왜 외국 정상의 알레르기가 보험상품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 뒤 잘 팔렸다.
◆세라티 결절 방문 마지막 날, 나는 현지 관리회비 반대 시위자료를 다시 봤다.
시위대 주장 중 하나는 대형 등록국이 고리망 이용량보다 정치적 규모에 따라 너무 많이 혜택을 받는다는 것.
제국 입장에서는 반대였다. 우리는 이용량에 비해 너무 많이 낸다고 봤다.
같은 분담식이 양쪽에서 불공정.
그게 정치의 정상일 수도 있다.
◆네마르-6에게 물었다.
“조정회에서 매년 이런 걸 다 싸우나?”
“매년은 아니다.”
“몇 년마다?”
“분담식 전면재검토는 36년 주기.”
아틀라스 기준으로도 짧지 않았다.
“그동안 틀리면?”
“부분조정.”
결국 그들도 타협하며 산다.
◆돌아가기 전, 네마르-6이 내게 작은 접근권 하나를 보냈다.
세라티 공공기록관의 일반 열람권.
기간.
100년.
관광기념품치고는 길었다.
“왜 100년?”
“귀측 수명과 외교주기를 고려.”
처음으로 루멘이 우리 시간감각에 맞춘 선물이었다.
나는 수락했다.
아우렐리움 집무실 벽에 붙은 관광지도 옆에는 그 접근권을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세라가 더 싫어할 것 같아서.
◆세라티에서 찍힌 내 사진은 예상보다 오래 돌았다. 문제는 기념품이 아니라 환전이었다.
루멘 등록통화를 처음 쓰는 황제가 결제승인을 세 번 틀렸다는 짧은 영상이 붙었다. 본토에서는 놀림거리가 됐고, 루멘에서는 신규등록국 사용성 문제라는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몇 달 뒤 결제화면에 ‘외부 등록국 간편모드’가 추가됐다.
황실 의전원은 그걸 외교성과로 기록하려 했다.
내가 지웠다.
그 정도는 그냥 불편해서 고친 기능이면 충분했다.
◆세라티에서 돌아온 뒤 외교원은 현지 시위자료를 정식으로 분석했다. 시위대 주장 중 일부는 과장됐지만, 아틀라스 등록이 분담식에 영향을 준다는 핵심은 사실이었다. 몇몇 작은 등록국은 제국의 규모 때문에 자기 회비가 오를까 걱정하고 있었다.
마리안은 그 보고서를 숨기지 않았다. 다음 조정회에서 제국이 분담식 공개를 요구할 때, 먼저 자기 등록이 남에게 어떤 비용을 만들었는지도 인정했다.
그 덕분인지 작은 등록국 셋이 제국 제안에 찬성했다. 시장길에서 받은 얇은 자료판 하나가 몇 년 뒤 표로 돌아왔다.
◆세라티 방문을 마친 뒤 오르테가는 한동안 루멘 생활기술만 들여다봤다. 항성도시 자체보다 폐수처리와 외벽 자가수리, 다양한 신체형태를 위한 공용교통에 더 관심을 보였다.
“왜 그런 걸 봐?”
“문명수준은 화려한 장비보다 유지비에서 더 잘 보입니다.”
이번에는 제법 좋은 문장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우렐리움 도시청에 세라티 자료를 일부 공유하게 했다. 몇 년 뒤 수도 외곽의 다종족 환승구 설계가 바뀌었다.
황제가 시장에서 기념품을 샀던 여행이 교통설계까지 건드릴 줄은 그때 몰랐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