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141화 — 등록된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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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 연속체와의 두 번째 회담은 정확히 18개월 뒤 열렸다. 이번에는 빈 공간에 작은 중계구조물 하나만 떠 있지 않았다. 마리안 세르가 탄 외교함이 지정좌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세 척의 낯선 함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접촉 때 봤던 ‘경계사절 44’와 형태는 비슷했지만 크기가 달랐다. 가장 큰 배는 제국 전함보다 짧았고, 표면에는 포탑도 창문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선체를 따라 빛이 흐르듯 이동했다.
오르테가가 원격분석 화면을 보며 낮게 말했다. “무장인지 추진기관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마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외교관에게는 구분 못 하는 무기가 더 성가셨다. 통신은 지난번보다 빨랐다.
[아틀라스 제국의 대표권한을 재확인한다.]
마리안은 황실 전권증명과 외교장관 권한범위를 보냈다. 전쟁선포도, 영토양도도, 황위와 관련된 약속도 할 수 없는 제한전권. 대신 통상·정보교환·외교관계 개설까지는 가능했다. 루멘은 4초 만에 답했다. [권한범위 적정.]
이번에는 상대도 자기 대표권한을 일부 공개했다.
[경계연속 관리권역 제4외교대리.]
이름은 번역이 어려웠다. 개인명인지 직책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제국 번역체계는 일단 ‘세이렌-4’라고 표기했다. 마리안이 물었다. “개인 이름입니까?”
[기능호칭과 지속개체식별자를 결합한 명칭.]
“그럼 개인입니까?”
[귀측 의미의 개인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첫 문장부터 쉽지 않았다.
◆루멘은 곧바로 질문서를 보냈다. 제국 영토규모. 인구. 보호권역. 황제권한. 하원과 상원. 군사통수체계. 문명등급 평가방식. 대단절. 질문이 너무 많았다. 마리안은 절반에서 멈췄다.
“상호성이 부족합니다.”
[설명 요청.]
“저희는 계속 대답하고 있습니다. 귀측 정치구조와 인구, 영역은 거의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12초. 지난 회담보다 긴 침묵이었다.
[경계접촉 초기 단계에서 내부전체구조 공개는 표준이 아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측은 등록신청 측이다.]
마리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굳었다.
“신청한 적 없습니다.”
이번에는 23초.
[정정. 경계접촉 발생 측.]
표현이 바뀌었다. 황궁에서 중계를 보던 나는 웃었다. 세라가 옆에서 말했다. “한 번 밀렸군요.”
“마리안이?”
“루멘이요.”
◆첫 합의는 그 자리에서 나왔다. 양측은 ‘질문 하나에 질문 하나’라는 단순한 원칙을 쓰기로 했다. 제국이 인구범위를 공개하면 루멘도 관리권역 규모를 공개한다. 제국이 황제의 전쟁권한을 설명하면 루멘도 경계관리자가 어느 수준까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밝힌다. 마리안은 제국 현재 시민권역 약 7조와 외부 보호·연결권역의 구조를 설명했다.
루멘의 답은 숫자가 아니었다.
[경계연속 제4관리권역: 상시관리 항성결절 812.]
항성계인지 물었다. 아니었다. 한 결절이 여러 항성계를 관리할 수도 있고, 하나의 항성계를 여러 결절이 나눌 수도 있었다. 또 다른 질문.
“귀측 전체 인구는?”
[현재 대표권한 범위를 초과.]
여기서 더 밀어도 안 나온다. 마리안은 넘어갔다. 루멘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보호국이었다.
[주권 일부를 보유하면서 외교와 전략방위를 상위정치단위에 귀속.]
“맞습니다.”
[강제편입과 자발편입이 혼재하는가.]
“예.”
[이탈 가능성.]
마리안은 잠깐 멈췄다.
“조약과 지위에 따라 다릅니다.”
[즉, 비균질 주권연결망.]
지난번과 같은 표현. 마리안이 되물었다. “귀측에는 비슷한 구조가 없습니까?”
[있다.]
처음으로.
◆루멘 연속체라는 이름이 조금 이해됐다. 하나의 단일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 여러 정치단위를 연결하는 상위체계. 세레프와도 다르고. 오르비스와도 다르다. 다음 질문은 대단절이었다.
[귀측은 약 100여 년 이내에 대규모 인과단절을 경험했는가.]
마리안의 시선이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고리망 기록에 귀측 권역의 연속성 단절 흔적이 존재.]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오르테가가 황궁에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에일린은 말없이 기록만 확대했다. 나는 마리안에게 개입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리할 수 있다.
“기록을 공유할 수 있습니까?”
[일부.]
대가. 당연히 있었다.
[귀측이 보유한 고리망 접속자료와 상호교환.]
마리안은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
“범위를 먼저 제시하십시오.”
[합리적.]
협상답게 돌아간다.
◆루멘이 보내온 첫 자료는 47초짜리 기록이 아니었다. 짧은 수치표. 약 33년 전이 아니라, 루멘 시간계로 환산한 사건시점. 고리망 제4경계에서 대규모 경로상실. 경계 안쪽 다수 신호 일시소실. 그 뒤 전혀 다른 좌표관계에서 일부 재등장. 우리 대단절과 맞았다. 그런데 한 줄이 더 있었다.
[사건 직전 미확인 관리질의 31회.]
나는 화면을 멈췄다.
“관리질의.”
세라가 내 쪽을 봤다. 대단절 기록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제국 행정망을 읽던 미확인 고권한 질의와 비슷한 냄새였다. 마리안은 묻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최고기밀 전체가 공유돼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대신.
“관리질의의 출처는?”
[불명.]
“루멘 연속체의 것입니까?”
[아니다.]
“확실합니까?”
[현존 루멘 경계관리 규격과 불일치.]
◆황궁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 정보 하나만으로. 루멘을 대단절의 범인 후보에서 완전히 뺄 수는 없다. 거짓말 가능. 내부분파 가능. 옛 체계 가능. 그러나 적어도. 상대가 먼저 이런 자료를 내놓았다. 회담은 6시간 계속됐다. 통상은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기술도. 대신 서로의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끝날 무렵 세이렌-4가 말했다. [아틀라스 제국은 등록가능한 주권정치단위로 분류된다.]
마리안이 바로 물었다. “등록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경계망 접근규칙, 통신우선순위, 분쟁처리 절차가 설정된다.]
“거부하면?”
[접근제한 유지.]
“불이익?”
[물리진입 불가.]
그게 불이익. 마리안은 웃지 않았다.
“검토하겠습니다.”
[기한 없음.]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문장. 회담이 끝난 뒤 외교함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국 기술진이 루멘이 허용한 중계구조물 외벽을 비접촉 방식으로 측정하는 동안, 마리안은 함교 창가에 혼자 서 있었다. 부관이 다가왔다.
“장관님, 저쪽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보십니까?”
마리안은 잠시 생각했다.
“모릅니다.”
“그런데 등록이라니.”
“우리가 약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라, 남의 문 앞에 처음 서봐서 기분이 나쁜 겁니다.”
부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서 경계사절 함선 세 척이 천천히 방향을 돌렸다. 포문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도, 제국 함교의 누구도 그 배들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마리안은 그 모습을 오래 지켜봤다.
◆등록이라는 단어는 본토에서 생각보다 큰 반발을 불렀다. 외교원이 회담 요약을 공개하자 하원 질의가 쏟아졌다.
“제국이 누구에게 등록됩니까?”
“국가 위에 국가가 있다는 뜻입니까?”
“거부하면 전쟁입니까?”
마리안은 귀환한 지 이틀 만에 하원 외교위원회에 나갔다. 75만 석 전체가 한 회의실에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질의는 수천 곳에서 동시에 올라왔다.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등록은 복속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고리망의 출입규칙입니다.”
“왜 우리가 그 규칙을 따라야 합니까?”
마리안은 잠깐 쉬었다.
“그 고리망이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단순하지만 듣기 싫은 사실. 상원에서는 반대로 실용론이 더 강했다. 총 150표 안에서 재상과 장관, 대권역 상원의원들이 자료를 봤다. 외부권역 대표 중 한 명이 물었다. “등록하지 않으면 고리망을 못 씁니까?”
“현재 확인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체 초광속 항로가 있습니까?”
“충분합니다.”
“그럼 급할 게 없군요.”
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이 가장 중요했다. 루멘의 문이 닫혀도 제국이 굶는 건 아니다.
◆본토 언론은 루멘을 두 종류로 상상했다. 하나는 제국보다 훨씬 강한 초문명. 다른 하나는 오래된 시설을 관리하는 관료조직. 둘 다 증거가 부족했다. 오르테가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기자가 웃었다. “시청자가 싫어합니다.”
“저도 압니다.”
그는 정말 싫어 보였다. 세레프의 반응은 더 조심스러웠다. 아델 세렌과 노드-칼릭스가 공동분석을 보냈다.
[루멘 통신규격은 세레프 고급정보망보다 최소 두 세대 이상 높은 요소 포함.]
[그러나 전체 문명생산력·군사력은 불명.]
[고리망 제작주체와 루멘 연속체는 분리해 판단할 것.]
중요한 경고. 고리망이 대단해 보여도. 그들이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나는 전략회의에서 그 문장에 표시했다.
“이거.”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리를 루멘 기술이라고 가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맞아.”
과거 게임이라고 믿었던 시절이라면 화면에 ‘고대 관문’ 같은 이름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이름부터 함부로 붙이면 안 된다.
◆루멘이 보낸 대단절 자료는 황실 제0분석실로 바로 들어갔다. 공개자료와 분리. ‘미확인 관리질의 31회.’ 제국 대단절 직전 기록의 고권한 조회와 비교. 시간간격. 유사. 통신형태. 일부 겹침. 완전 일치 아님. 에일린은 가설을 네 개로 나눴다. 루멘이 모르는 제3자. 루멘의 옛 체계. 고리망 자체의 자동관리기능. 제국 내부에서 외부처럼 보인 신호.
어느 것도 지우지 않았다.
“확률은?”
내가 묻자 그녀는 답했다. “지금 숫자를 붙이면 숫자만 남습니다.”
칼드라 때의 63퍼센트를 아직 기억하는 사람다운 답이었다. 루멘 자료 안에는 이상한 한 줄이 더 있었다.
[관리질의 응답 실패 후 경계상태 변동.]
무엇이 응답했는가. 누가 실패했는가. 자료가 잘려 있었다. 마리안에게 추가요청을 맡기지 않았다. 다음 회담에서 범위를 넓힐지 먼저 판단해야 했다.
◆그날 밤 세라는 내 책상에 루멘 관련 여론조사를 놓았다. ‘위협적이다.’ 41퍼센트. ‘기회다.’ 38. ‘모르겠다.’ 나머지.
“생각보다 차분하네.”
“제국 시민들은 새 외계문명에 익숙해졌습니다.”
로하르부터 시작해 수십 년. 이제 외계인이 나타났다고 사회가 흔들리는 시대는 아니다. 다만. 제국보다 클지도 모르는 외계문명은 처음. 세라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고리 연구정거장 확장예산. 루멘 접촉 때문에 연구원과 외교인력이 몰리며 기존 시설이 부족했다.
“얼마.”
숫자. 크지만 감당 가능.
“승인.”
“보안심사도 강화합니다.”
“왜.”
“접촉시설이 전략등급으로 올라갑니다.”
맞다. 그때는. 그 문장이 얼마나 빨리 현실이 될지 몰랐다. 확장공사는 시작됐다. 정거장 한쪽에서는 새 연구동 골조가 올라가고, 다른 쪽에서는 218명이 죽게 될 환승구역이 아직 평범한 출근길로 쓰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 길을 특별히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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