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40화 — 첫 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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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와의 장기통상조약 협상은 19일 걸렸다.
전쟁 하나 끝내는 것보다 길었다.
나는 협상 11일째에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마리안이 답했다.
“돈 문제라서요.”
“전쟁도 돈 문제 많잖아.”
“그건 폐하께서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건?”
“상대가 서명해야 합니다.”
납득했다.
◆쟁점은 다섯 개였다.
통항세.
상업거점.
지식재산권.
금융감독.
보호권역 내 무기판매.
앞의 네 개는 흥정.
마지막은 흥정하지 않았다.
제국 입장.
[아르카디아는 제국 보호권역 내 비제국 군사조직에 중화기·전투함·전략부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아르카디아 입장.
[합법정부의 방위권을 침해한다.]
나는 말했다.
“그 합법정부의 방위를 우리가 맡아.”
리에나가 반박했다.
“로하르 지역방위군도 있지 않습니까?”
“경무장.”
“그럼 경무장은 팔 수 있습니까?”
“목록 합의.”
협상은 그렇게 세부로 들어갔다.
소총은?
가능.
궤도포는?
불가.
경비정은?
조건부.
순양함은?
불가.
전자전장비는?
기능별.
마리안이 78페이지짜리 목록을 만들었다.
나는 3페이지 읽고 승인했다.
◆상업거점은 두 곳으로 결정됐다.
제9자유항.
벨로아 수도항 외곽.
아르카디아는 영구임차를 원했다.
제국은 50년 갱신제로 제한했다.
리에나는 말했다.
“50년은 너무 짧습니다.”
“자네 종족 수명은?”
“평균 210년.”
“그럼 50년 안 짧아.”
“아틀라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맞았다.
결국 80년.
20년마다 조건재검토.
타협했다.
◆지식재산권은 오히려 제국이 더 강하게 요구했다.
아르카디아 기업이 제국 기술을 복제할 경우.
제국 기업이 아르카디아 설계를 복제할 경우.
같은 규칙.
일부 귀족기업이 반발했다.
“우리 시장규모가 훨씬 큰데 동일규칙은 불리합니다.”
“남의 특허 훔치고 싶다는 말을 길게 하는 거야?”
기업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강대국이 작은 나라의 권리를 지켜주는 이유는 착해서만이 아니다.
우리 기업의 권리도 밖에서 지키려면 규칙이 상호적이어야 했다.
◆조약 체결식은 아우렐리움 외교지구 신설 아르카디아 공관에서 열렸다.
상징적으로 그쪽을 선택했다.
27년 만의 첫 신규 외국공관.
그리고 대단절 이후 제국이 맺는 첫 대규모 독립국 통상조약.
동시시청 1조 2천억.
전쟁선포도 아니고 황실기념일도 아닌데 엄청난 숫자였다.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컸다.
◆리에나는 서명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조약명에 ‘상호주권존중’을 넣지 않으시겠습니까?”
마리안이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못 지킬 말은 안 넣어.”
“저희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현재 조약범위에서는 존중해.”
“현재?”
“상황 영원히 같아?”
리에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귀국 외교문서는 미래의 배신 가능성까지 정직하게 남기는군요.”
“배신은 약속 깨는 거지. 약속 안 한 건 배신 아니야.”
결국 대신 문구가 들어갔다.
[양국은 본 조약의 유효기간 동안 상호 영토·상업권과 체결된 의무를 존중한다.]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
◆서명.
황실인장.
아르카디아 공화인장.
박수.
조약기간 80년.
아틀라스 기준으로는 짧았다.
아르카디아 기준으로는 한 세대에 가까웠다.
같은 숫자의 무게가 종족마다 달랐다.
◆조약 직후 시장이 움직였다.
아르카디아 상선 수천 척이 보호권역 진입허가를 신청.
제국기업은 아르카디아 시장조사단을 보냈다.
벨로아 은행은 아르카디아 결제망과 연결.
로하르 농업기업은 처음으로 외부 수출계약 체결.
세르마크 조선소는 민간화물선 주문을 수주했다.
몇 달 전 서로 포격하던 국가들이.
이제 같은 통상망에서 돈을 벌었다.
제국질서는 총으로 시작됐지만.
유지하는 건 점점 계약서가 되고 있었다.
◆아르카디아는 조약 보너스로 외부 성도 일부를 제공했다.
거래대가가 아니라 우호표시라고 했다.
에일린은 당연히 의심했다.
“일부러 틀린 정보일 가능성.”
“확인해.”
“이미.”
지도에는 새로운 이름이 나타났다.
오르비스 상업동맹.
라사드 성왕국.
카일론 자유성계.
그리고.
바르케시 제국연합.
나는 마지막 이름에서 멈췄다.
기억 속에 있었다.
플레이어블 세력.
군사국가.
강한 함대.
예전 화면에서는 중후반 경쟁자.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거리?”
“현재 확인된 항로로 약 1,900광년.”
“멀군.”
“아르카디아 중계망 쓰면 짧아집니다.”
그게 통상의 가치였다.
상품보다 길을 산다.
◆리에나는 지도를 설명했다.
“오르비스는 저희보다 큰 상업권입니다.”
“얼마나?”
“회원국 포함 인구 약 8천억.”
회의실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기술?”
“일부 VII급.”
“군사?”
“직접군은 많지 않습니다.”
“바르케시는?”
그녀가 잠시 멈췄다.
“싸우지 않는 걸 권합니다.”
아델라인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왜?”
“전쟁을 좋아해서.”
“강합니까?”
“저희보다 훨씬.”
“제국보다?”
리에나는 나를 봤다.
“모릅니다.”
좋은 답이었다.
◆오르테가는 즉시 탐사계획을 요청했다.
라울은 군사정보를 원했다.
상무원은 오르비스 시장을 원했다.
종교연구부는 라사드에 관심을 가졌다.
제국은 갑자기 바깥세계 이름을 너무 많이 얻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하나씩.”
모두 조용해졌다.
“우린 이제 막 회랑 하나 정리했어.”
제국은 강했다.
그래도 우주 전체를 한 달 만에 먹을 필요는 없었다.
정보.
항로.
현지질서.
통치.
하나씩 쌓아야 오래 간다.
◆그날 늦은 밤.
나는 아르카디아가 준 성도를 개인실에 띄웠다.
밝은 점 수백 개.
국가.
도시.
문명.
우리가 모르는 역사.
대단절 전 제국이 알던 지도와 전혀 다른 세계.
27년 동안 본토만 바라봤다.
이제 다시 밖을 본다.
로하르와 세르마크는 시작이었다.
아르카디아는 문이었다.
그 문 너머에는.
제국이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나라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다음 명령을 작성했다.
[제2차 외부권역 전략탐사계획 수립.]
정복명령이 아니었다.
아직은.
먼저 봐야 했다.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제국질서 안에 어떤 자리로 들어올 수 있는지.
◆통상조약이 발효되자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 것은 세금이었다.
아르카디아 상단이 제9자유항에서 벨로아 회사로 화물을 넘기고 다시 로하르로 보내 관세차익을 노렸다.
합법과 탈세 사이의 회색지대.
세 나라 세법이 달랐다.
벨로아 세무관이 말했다.
“우리 규정으로는 합법입니다.”
제국 세무원은 답했다.
“보호권역 전체로 보면 우회거래입니다.”
결국 첫 공동세무위원회가 열렸다.
조약은 서명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문제의 상단 대표는 벌금을 받을 줄 알았다.
대신 제국은 6개월 유예를 줬다.
“왜 처벌하지 않습니까?”
본토 의원이 물었다.
“규칙이 애매했잖아.”
“허점을 이용했습니다.”
“허점 만든 쪽도 책임 있어.”
6개월 뒤 새 원산지 규정이 적용됐다.
같은 수법을 다시 쓰면 처벌.
법은 함정을 파는 도구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무엇이 금지인지 알게 만드는 도구였다.
◆통상조약 체결을 기념해 아르카디아는 거대한 상업박람회를 제안했다.
장소는 제9자유항.
제국, 로하르, 세르마크, 벨로아, 카르디아 기업들이 참여.
첫날 방문객 1억 8천만.
가상접속은 600억을 넘었다.
본토 기업은 최신 소비재를 가져왔다.
로하르는 식품과 생명자원.
세르마크는 중공업부품.
벨로아는 금융상품.
카르디아는 선박수리와 용병에서 전환한 구조서비스.
전쟁지역이 시장으로 바뀌는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박람회 한구석에서 작은 로하르 회사가 아르카디아 상단과 계약을 맺었다.
농업용 미생물.
계약금은 회사 연매출의 여덟 배.
대표는 서명 뒤 울었다.
인터뷰에서 말했다.
“제국이 온 뒤 처음으로 전쟁 말고 다른 이유로 우주를 나갑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팽창은 군함만 앞으로 보내는 일이 아니다.
보호국 상인이 더 먼 별에 가는 것도 제국의 확장이었다.
◆박람회 마지막 날 리에나가 지도를 하나 더 건넸다.
“공식정부 자료가 아니라 상인조합 정보입니다.”
“신뢰도?”
“70퍼센트 정도.”
“왜 줘?”
“다음 시장을 열고 싶으니까요.”
지도 끝에는 오르비스 방향의 신규항로 세 개가 표시돼 있었다.
그리고 한 구역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통상선 실종 빈발.]
“해적?”
“모릅니다.”
“바르케시?”
“그쪽도 아닙니다.”
최근 18개월.
상선 41척 실종.
잔해 없음.
구조신호 없음.
오르테가가 지도를 확대했다.
“생체오염 기록은?”
리에나가 말했다.
“왜 그걸 묻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너무 이르다.
버그라는 이름을 외부에 함부로 꺼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상선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몇몇 초기사건이 있었다.
게임에서라면 단순한 이벤트 문구였던 것.
현실에서는 선원 수만 명의 실종.
나는 명령했다.
“탐사선 보내.”
제2차 외부권역 탐사가.
생각보다 빨리 첫 목적지를 얻었다.
제2차 전략탐사단 편성에는 군함보다 과학선이 많았다.
오르테가가 요구했다.
“이번엔 쏘기 전에 보겠습니다.”
아델라인이 답했다.
“쏴야 할 때 늦지만 마십시오.”
둘의 의견을 합쳐 탐사단이 만들어졌다.
과학선 14.
정보함 6.
구조선 9.
전투함 18.
정복함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필요하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전력은 갖췄다.
첫 목적지.
아르카디아 상선 41척이 사라진 무명권역.
지도에는 아직 이름조차 없었다.
나는 임시코드를 붙였다.
[X-41.]
다음 세계는 그 숫자 뒤에 숨어 있었다.
출항명령 마지막 줄에는 단순한 문장이 붙었다.
[현지 지성체 발견 시 먼저 평가하고, 필요하면 보호한다.]
평화접촉 의무는 아니었다.
그래도 모르는 대상을 이유 없이 쏠 필요도 없었다.
제국의 자신감은 먼저 공격하는 데서 나오지 않았다.
언제든 이길 수 있으니 먼저 볼 여유가 있다는 데서 나왔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