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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32화 — 가격표를 붙이는 사람들

별의 제국 · 32 / 290약 8분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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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 상선단이 제9자유항에 정박한 지 36시간.

항구의 거래량은 평소의 4.7배가 됐다.

아르카디아인들은 뭐든 샀다.

로하르 발효식품.

세르마크 중력보조부품.

제국산 기초의약품.

심지어 보호권역 출범 기념품까지.

그리고 뭐든 팔았다.

“저 사람들은 진짜 나라보다 시장 같군.”

내 말에 마리안이 답했다.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르카디아 성간공화국의 헌법요약본을 읽고 나니 이해됐다.

그들의 상원 절반은 지역대표.

나머지 절반은 등록상업권역과 직능조합 대표.

국가예산의 상당부분을 항로세와 결제수수료가 차지했다.

군대보다 보험조합이 더 오래된 나라.

특이했다.

“효율은?”

세라가 자료를 넘겼다.

“상당히 높습니다. 행정비용 대비 세수 효율은 로하르의 세 배 이상.”

“배울 건 있네.”

“예.”

제국은 하위문명을 낮게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좋은 제도까지 낮게 평가할 필요는 없었다.

첫 통상시험은 의도적으로 작게 열었다.

아르카디아 상선 12척.

제국 보호권역 항만 세 곳.

상품범주 48개.

무기·전략기술·생체증폭제는 제외.

관세율은 낮췄지만 거래기록은 전부 제국망에 올라오게 했다.

리에나는 계약서를 읽다가 멈췄다.

“실시간 거래공개?”

“세무기관에는.”

“상업기밀은?”

“가격·수량은 익명처리.”

“구매자 신원은?”

“범죄수사 아니면 비공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자유롭군요.”

세라가 답했다.

“무엇을 예상하셨습니까?”

“황제가 모든 상거래를 승인하는 나라?”

나는 옆에서 말했다.

“나 그렇게 한가해 보여?”

리에나가 미세하게 웃었다.

“첫날 직접 나오셔서요.”

할 말이 없었다.

아르카디아는 결제기술 하나를 시연했다.

‘분산신용격자’.

행성간 통신지연이 있어도 지역시장에서 신용을 임시확정하고, 나중에 중앙장부와 정산하는 방식.

제국도 비슷한 체계가 있었다.

기술 수준은 낮았다.

그런데 알고리즘 하나가 좋았다.

거래상대의 파산위험을 지역 네트워크에서 빠르게 재평가하는 방식.

재무원 분석관이 말했다.

“우리 변경시장에 적용하면 소액신용 비용을 3~4퍼센트 줄일 수 있습니다.”

“사자.”

“특허를 요구할 겁니다.”

“돈 주면 되잖아.”

리에나는 특허대가로 제국의 초저온 화물보존기술 일부를 요구했다.

재무원과 기술보안원이 동시에 반대했다.

나는 물었다.

“전략기술이야?”

“아닙니다.”

“그럼?”

“격차가 줄어듭니다.”

“그게 이유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격차는 전략기술에서 지켜. 냉동창고까지 못 쓰게 해서 유지하는 게 아니야.”

교환은 승인됐다.

아르카디아 알고리즘은 제국 변경금융망에 들어갔다.

제국 화물보존기는 아르카디아 상선에 들어갔다.

첫 기술교환이었다.

제9자유항에서는 작은 사건도 있었다.

나는 현장을 직접 보러 갔다.

호위는 최소화했다.

최소화라고 해도 카시안과 근위 14명이었다.

시장에는 로하르인, 세르마크인, 아르카디아인, 아틀라스 주둔군이 뒤섞였다.

나는 과일처럼 생긴 외계식품 앞에 멈췄다.

주인이 세르마크인이었다.

“얼마지?”

그가 나를 봤다.

“제국인?”

“응.”

“군인?”

“비슷해.”

카시안이 뒤에서 아주 작게 한숨 쉬었다.

상인은 나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당신 황제 닮았네.”

“그 말 자주 들어.”

옆에 있던 로하르 학생이 웃었다.

“황제가 시장에서 과일 사고 있겠어요?”

상인도 웃었다.

“그러니까.”

나는 과일 두 개를 샀다.

제국 크레딧을 찍었다.

결제단말기에 황실 인증표식이 떴다.

상인의 웃음이 멈췄다.

학생도 멈췄다.

주변 단말기들이 보안상 자동으로 황실근위 식별신호를 띄웠다.

카시안이 말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상인이 얼굴이 새하얘졌다.

“폐, 폐하?”

“가격 바꾸진 마.”

“무슨.”

“황제 왔다고 비싸게 받으면 안 되잖아.”

학생이 웃음을 참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과일 하나를 그에게 줬다.

“아까 안 믿었으니까 벌.”

“이게 왜 벌입니까?”

“나도 아직 맛 몰라.”

먹어봤다.

시었다.

학생도 먹었다.

얼굴이 찌푸려졌다.

“벌 맞네요.”

그제야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황제가 실제로 시장에 있다는 사실이 퍼지는 데 40초도 걸리지 않았다.

15분 뒤 경호국이 나를 강제로 빼냈다.

시장 영상은 제국망에서 폭발했다.

24시간 조회수 1조 1천억.

본토 젊은 세대는 밈을 만들었다.

[황제 인증 결제.]

[황실 산미평가.]

[폐하도 할인쿠폰 쓰십니까.]

세라는 전부 무시하라고 했다.

나는 몇 개 저장했다.

“왜 저장하십니까?”

“재밌잖아.”

“황실기록원에 들어갑니다.”

“그건 빼.”

“이미 들어갔습니다.”

황제의 삶은 기록이 너무 많이 남았다.

아르카디아 대표단은 그 영상을 보고 다른 부분에 놀랐다.

리에나가 물었다.

“황제가 경호를 저 정도만 데리고 시장에 갈 수 있습니까?”

“저 정도만?”

“저희 국가원수라면 경비구역을 비웁니다.”

카시안이 옆에서 말했다.

“저도 비우고 싶었습니다.”

나는 무시했다.

리에나가 다시 물었다.

“시민들이 황제에게 접근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뭘 두려워해?”

“황제인데요.”

“그래서?”

그녀가 잠깐 말을 잃었다.

제국은 강한 군주국이었다.

하지만 시민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황제가 전쟁과 외교와 전략기술을 결정한다.

동시에 시민은 시장에서 황제를 닮았다고 농담한다.

둘 다 진짜였다.

통상시험 첫 주가 끝났다.

거래규모는 예상보다 2.3배 컸다.

무역분쟁 318건.

검역위반 17건.

밀수 4건.

간첩혐의 2건.

그리고 세금은 잘 걷혔다.

세라가 말했다.

“밀수비율이 낮습니다.”

“아르카디아가 착해서?”

“관세가 낮아서.”

“그게 더 믿을 만하네.”

세금을 너무 높이면 범죄산업을 만든다.

제국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배운 교훈이었다.

리에나는 첫 주 마지막 회담에서 말했다.

“귀국과 장기통상조약을 원합니다.”

“조건.”

“무기판매 제한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좋아.”

“대신 보호권역 내 상업거점 설치권.”

“어디까지?”

“항만 세 곳.”

“한 곳.”

“두 곳.”

“한 곳 반은 어떻게 하지?”

그녀가 웃었다.

“두 곳으로 하시죠.”

“검토.”

협상이 시작됐다.

정복보다 느렸다.

하지만 때로는 함포보다 오래가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르카디아는 아직 보호국이 아니었다.

적도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상품에.

기술에.

항로에.

그리고 조금씩.

서로의 가치에도.

시장사건 다음 날 상점 주인은 황실에서 연락을 받을까 봐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실제로 받은 연락은 세무서 안내문 하나뿐이었다.

[황실 방문과 무관하게 정상영업을 계속하십시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왜요?”

“진짜 아무 일도 없어서요.”

제국 시민들은 웃었지만, 보호권역 주민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군주를 만난 뒤 가게가 폐쇄되지도, 특혜를 받지도 않는다.

황제가 과일 하나 샀다는 사실이 세금이나 허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 평범함 자체가 제국제도의 힘이었다.

아르카디아 상인들은 반대로 황제의 공개된 구매기록을 상품화하려 했다.

[황제가 먹은 과일.]

가격이 30배 뛰었다.

벨로아 거래소까지 선물계약을 만들려 했다.

나는 보고받고 물었다.

“이걸 막아야 해?”

재무장관이 말했다.

“사기만 아니면 막을 근거는 없습니다.”

“진짜 같은 과일이야?”

“같은 품종입니다.”

“그럼 놔둬.”

사흘 뒤 가격은 다시 떨어졌다.

황제도 시장가격을 영원히 올리지는 못했다.

첫 통상주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제국상품은 예상과 달리 의료장비도, 초소형 발전기도 아니었다.

번역기였다.

아르카디아 표준어와 로하르어, 세르마크어, 제국어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저가형 통역단말.

사람들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 작은 거래가 폭발했다.

숙박.

식당.

수리.

관광.

개인택배.

상무원은 그 통계를 보고 새 정책을 제안했다.

[외부권역 언어팩을 공공표준으로 개방.]

기업들은 반대했다.

독점수익이 줄어든다.

나는 공공표준 쪽을 택했다.

언어장벽을 낮추는 게 장기세수에 더 유리했다.

제국은 가끔 무료로 뿌리는 것이 더 큰 돈을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리에나는 그 결정을 듣고 말했다.

“귀국은 상업국가가 아닌데도 시장을 잘 압니다.”

“7조 명 먹여 살리려면.”

“황제가 경제학도 배웁니까?”

“안 배우면 망해.”

“직접?”

“기초는.”

“그럼 통화정책도 결정합니까?”

“최종임명권은 있어도 금리 숫자까지 내가 정하진 않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이 강한데 자주 위임하시는군요.”

“내가 다 잘할 리 없잖아.”

황제는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무엇을 직접 결정하지 않을지 알아야 했다.

아르카디아 상인 한 명은 제국식 소비자보호법을 보고 황당해했다.

“환불을 30일이나 보장합니까?”

벨로아 상인이 답했다.

“제국 기준이라네요.”

“판매자가 너무 불리하지 않습니까?”

제국 상무관은 말했다.

“그래서 사기율이 낮습니다.”

며칠 뒤 아르카디아 상단도 자발적으로 같은 환불규칙을 광고에 붙였다.

매출이 올랐다.

규칙은 강제로만 퍼지는 게 아니었다.

돈이 되면 더 빨리 퍼졌다.

통상시험의 마지막 회의에서 본토 기업 하나가 아르카디아 기업을 통째로 사겠다고 제안했다.

가격은 상대 회사 시가총액의 세 배.

리에나는 즉시 거절했다.

“돈이 많다고 모든 걸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업대표에게 인수시도를 중단시키진 않았다.

대신 적대적 인수에 아르카디아법을 그대로 적용하게 했다.

시장을 열었다고 상대 경제를 하루 만에 삼키는 건 장기적으로 좋지 않았다.

통상도 속도가 중요했다.

통상시험 종료보고서 마지막에는 작은 권고가 붙었다.

[외부 상인의 제국 내 소비자교육 필요.]

아르카디아 상인들이 제국 소비자에게 과장광고를 했다가 집단환불을 맞은 사례 때문이었다.

리에나는 보고서를 읽고 한숨 쉬었다.

“시장도 문명마다 예절이 다르군요.”

맞았다.

거래가 자유로울수록 규칙을 모르면 더 크게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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