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25화 — 감독국
지난 화 끝부분 다시 보기
로하르가 보호국이 된 지 이틀 뒤.
세르마크는 군축감독협정에 서명했다.
서명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황제도 가지 않았다.
바렌 노크와 제국 군사감독관, 외무원 대표가 서명했다.
세르마크 사람들에게는 패전협정에 가까웠다.
굳이 축하행사처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협정 첫 조항.
[세르마크 군정연합은 국가형태와 국내행정권을 유지한다.]
둘째.
[대외전쟁권을 제국 감독기간 동안 정지한다.]
셋째.
[대외군사동맹·전략협정은 제국 승인대상이다.]
넷째.
[전함전력 55퍼센트 감축.]
다섯째.
[감축함정 중 사용가능 선박은 해체 대신 회랑 치안·구조·수송용으로 전환 가능.]
여섯째.
[제4전선군 해체.]
일곱째.
[5년 내 민간행정부와 군 지휘부 분리.]
이 부분이 가장 컸다.
세르마크는 군인이 총독을 겸했다.
제국은 그 구조를 뜯어고치려 했다.
바렌이 반발했다.
“우리 체제를 없애는 것 아닌가?”
제국 행정관이 답했다.
“군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행정을 군에서 분리하는 겁니다.”
“왜?”
“73년 동안 못 끝낸 전쟁이 국가 전체를 삼켰으니까.”
세르마크 대표들은 불쾌해했다.
그래도 서명했다.
힘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민들도 지쳐 있었다.
◆함대감축은 예상외로 큰 경제문제를 만들었다.
수백 개 조선소.
수천 개 부품기업.
수억 명의 군수노동자.
전쟁이 끝난다고 이들에게 당장 다른 직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군축만 하면 경제가 무너집니다.”
재무원이 보고했다.
“전환계획.”
“제국이 주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뭘 만들게 하지?”
“상선, 구조선, 발전설비, 궤도주거구.”
나는 승인했다.
전쟁산업을 죽이지 않고 방향을 바꾼다.
세르마크 조선소에는 제국 규격보다 낮은 중형상선 주문이 대량으로 들어갔다.
회랑 물류망이 커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세르마크 노동자 입장에서는 황제가 자기 군함을 없애면서 동시에 일자리를 준 셈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생길 만했다.
◆하르드 레칸은 새로 만들어진 ‘세르마크 지역방위군’ 초대사령관 후보가 됐다.
그가 제국 감독관에게 물었다.
“우리가 누구와 싸우지?”
“해적.”
“또?”
“재난구조.”
“그건 싸움이 아니다.”
“버그가 나오면.”
하르드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뭔가?”
제국 감독관은 설명하지 않았다.
“나중에 교육받게 됩니다.”
제국은 버그 정보를 하위문명에 함부로 풀지 않았다.
공포만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호권역군도 버그와 싸울 수 있어야 했다.
그게 제국이 현지군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세르마크 시민사회에서는 반제국시위가 이어졌다.
[점령군 철수]
[군축반대]
[세르마크는 세르마크다]
제국군은 막지 않았다.
폭력만 없으면.
처음에는 시위대도 당황했다.
자기 정부 시절에는 군정평의회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면 잡혀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제국 감독군 앞에서 황제 사진을 태워도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다.
대신 군기지에 돌을 던진 사람은 즉시 붙잡혔다.
“말은 자유. 시설 공격은 범죄.”
새 치안규칙은 단순했다.
일부 세르마크 지식인들은 이걸 ‘점령지에서 처음 얻은 표현의 자유’라고 비꼬았다.
제국 언론은 그 비꼼까지 그대로 번역해 내보냈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말했다.
“재밌네.”
세라가 물었다.
“검열하지 않으십니까?”
“왜?”
“점령정책 비판입니다.”
“틀린 부분 있으면 반박해.”
강한 국가는 비판을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협정 마지막 날 바렌이 나와 짧게 통화했다.
“황제.”
“상장. 아니, 이제 위원장인가?”
“둘 다 불편하다.”
“뭐라고 부를까?”
“바렌이면 된다.”
“좋아, 바렌.”
그가 잠깐 웃었다.
“우리는 당신 제국을 싫어할 거다.”
“그럴 수 있지.”
“적어도 한동안.”
“100년 뒤에도 싫어할 수 있고.”
“그럼 실패 아닌가?”
“아니.”
나는 말했다.
“제국을 좋아해야만 질서가 유지되는 체제면 약한 체제야.”
바렌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세르마크는 제국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로하르와 전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세르마크 군축은 함선 숫자만 줄이는 일이 아니었다.
군 계급도 줄어야 했다.
73년 전쟁 동안 장성이 너무 많아졌다.
전선마다 사령부가 생기고.
사령부마다 장군이 생겼다.
제국 감독단은 장성 1,840명 중 절반 이상을 전역시키라고 권고했다.
세르마크 군부가 가장 크게 반발한 부분이었다.
하르드 레칸은 오히려 찬성했다.
“지휘할 함대보다 제독이 많다.”
전역장성 일부는 지방행정·산업관리로 전환됐다.
군인밖에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민간사회로 나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제국은 재교육예산을 댔다.
처음에는 본토에서 ‘왜 패전국 장군 교육비를 우리가 내냐’는 불만도 나왔다.
재무원은 계산으로 답했다.
[실업 장성 1명 관리비용 < 반란 장성 1명 진압비용]
논쟁이 꽤 빨리 끝났다.
◆군수공장 민수전환 첫 제품은 화려하지 않았다.
농업용 대형기계.
로하르 전쟁피해지역에 투입됐다.
73년 동안 서로 포탄을 만들던 세르마크 공장이 로하르 농장을 복구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선전효과가 너무 좋아서 나는 일부러 광고하지 말라고 했다.
“왜요?”
공보관이 물었다.
“티 나잖아.”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편이 더 강했다.
실제로 로하르 농민 영상이 퍼졌다.
“세르마크제인데 쓸 만하네.”
세르마크 노동자가 댓글을 달았다.
“원래 우리 기계 잘 만든다.”
그 아래에서 또 싸움이 났지만 적어도 포탄은 오가지 않았다.
◆반제국 시위에는 황제 모형을 우스꽝스럽게 만든 인형도 등장했다.
머리는 지나치게 크고 왕관에는 돈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세라가 영상을 끄려 했다.
“놔둬.”
“보기 좋지 않습니다.”
“닮았어?”
“전혀요.”
“그럼 됐네.”
몇 주 뒤 그 인형이 본토에도 수입됐다.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샀다.
세르마크 반제국운동이 의도치 않게 제국에서 돈을 벌었다.
나는 그 보고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제국질서는 때때로 적대감까지 시장에 흡수했다.
◆세르마크 감독국에는 제국 총독 대신 ‘고등감독관’이 파견됐다.
총독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이유는 법적 지위가 보호국과도, 직할령과도 달랐기 때문이다.
초대 감독관은 리안 테모르.
530세.
과거 군 출신이지만 마지막 180년은 행정관으로 일했다.
그가 첫 회의에서 말했다.
“나는 세르마크를 아틀라스처럼 만들러 온 게 아니다.”
현지 관료들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만 다시 73년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들러 왔다.”
그건 훨씬 믿을 만한 말이었다.
리안은 첫 달에 군수예산을 41퍼센트 줄이고 교육·교통예산을 늘렸다.
세르마크 관료들은 처음에는 외세명령이라 반발했다.
1년 뒤 도로가 고쳐지고 학교예산이 늘면 반응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군축 첫 달 가장 큰 문제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세르마크군 감축대상은 1,800만 명이 넘었다.
한꺼번에 제대시키면 실업과 폭동이 생긴다.
제국은 12년에 걸친 단계감축안을 만들었다.
첫 3년은 신규충원 축소.
그다음 노후함 퇴역.
직업군인은 철도·조선·재난구조·항로보안으로 전환.
장교 일부는 제국식 군사교육을 받고 지역방위군으로 남는다.
하르드는 전환교육원 첫 강의에서 말했다.
“전쟁을 끝내는 건 제복을 벗기는 게 아니다. 제복을 벗은 뒤 먹고살 길을 만드는 거다.”
예전 강경파 장교들도 그 말에는 반대하기 어려웠다.
◆감독국 예산회의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이라는 단어가 국방보다 앞에 놓였다.
전년 대비:
군수조선 -38퍼센트.
민간선박 +61퍼센트.
교육 +44퍼센트.
도로·항만 +53퍼센트.
보건 +72퍼센트.
세르마크 야당은 이걸 제국식 선전예산이라고 비판했다.
리안은 예산표를 그대로 공개했다.
“선전이라 생각하면 5년 뒤 투표로 정부를 바꾸십시오.”
“감독관은 못 바꾸잖소.”
“맞습니다.”
그는 웃지도 않고 인정했다.
제국의 통치는 민주주의인 척하지 않았다.
현지정치는 열어두되 제국전략권은 선거대상이 아니었다.
◆반제국 방송국도 허가됐다.
단 하나의 조건.
폭력선동과 허위 비상정보 금지.
첫 방송 제목은 [우리는 정말 독립국인가?]였다.
정답은 복잡했다.
법적으로는 국가.
군사적으로는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는 점점 제국권.
사회적으로는 아직 세르마크.
사람들은 그 모호한 상태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군수도시 하나에서는 감축발표 뒤 주택가격이 폭락했다.
주민의 절반이 조선소와 군기지에서 먹고살던 곳이었다.
제국 개발원은 공장 일부를 민간 화물선과 구조선 생산라인으로 전환했다.
첫해에는 적자가 났다.
본토 하원에서는 왜 세르마크 산업까지 세금으로 살려야 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재상은 답했다.
“실업자 천만 명을 만드는 비용보다 쌉니다.”
둘째 해부터 화물선 주문이 늘었다.
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도시가 평화 때문에 사라질 필요는 없었다.
용도를 바꾸면 됐다.
◆전역군인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연금.
직업교육.
지역방위군 재지원.
개척단 지원.
흥미롭게도 상당수가 개척을 골랐다.
평생 군에서 살던 사람들이 국경 밖 새 행성에서 농장과 정비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국은 그들을 잠재적 반란군으로 묶어두는 대신 새 사회의 개척자로 흩었다.
그 과정에서 세르마크 최초의 민간 개척조합들이 생겨났다.
감독관실 문 앞에는 세르마크 국기와 제국기가 함께 걸렸다.
누군가는 굴욕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전쟁이 끝났다는 표지라고 불렀다.
리안은 어느 쪽 해석도 금지하지 않았다.
◆하르드는 지역방위군 장교들에게 제국어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을 직접 냈다.
바렌이 놀랐다.
“네가?”
“제국 지휘망을 써야 하니까.”
“자존심은?”
“통역기 고장 나면 자존심으로 명령 들을 건가?”
실용적인 군인은 빠르게 적응했다.
제국은 세르마크 전체에 제국어를 강제하지 않았지만 군 고위지휘부에는 요구했다.
전쟁 때 번역지연 1초가 함선 수십 척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정책도 영역마다 달랐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