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24화 — 보호조약
지난 화 끝부분 다시 보기
로하르 보호조약 서명식에는 내가 직접 갔다.
마리안이 반대했다.
“첫 보호국이라고 황제가 직접 가시면 이후 모든 보호국이 같은 의전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대단절 이후 첫 번째잖아.”
“그래서 더 선례가 됩니다.”
“그럼 선례문구를 넣어.”
“어떤 문구요?”
“역사적 특수사례.”
마리안이 나를 보다가 포기했다.
“법무원이 싫어할 겁니다.”
“걔들은 원래 싫어하는 게 많아.”
◆벨하임 왕궁 앞에는 수백만 명이 모였다.
내 얼굴은 이미 로하르에서도 유명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거의 매일 뉴스에 나왔으니까.
그래도 내가 실제로 왕궁 앞 광장에 나타나자 처음 몇 초는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설마 진짜 황제가 여기 있나’라는 표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시민 한 명이 친구에게 말했다.
“저 사람….”
“맞는 것 같은데.”
“황제가 그냥 걸어온다고?”
그 순간 황실근위가 뒤에서 문장을 펼쳤다.
광장 전체의 소리가 바뀌었다.
함성이라기보다 거대한 숨이 한꺼번에 빠지는 느낌.
그리고 몇 초 뒤 환호와 야유가 동시에 터졌다.
찬성파는 황실기를 흔들었다.
반대파는 [로하르는 로하르다]라는 현수막을 들었다.
나는 둘 다 지나쳤다.
세리아가 왕궁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오셨군요.”
“놀랐어?”
“조금.”
“반대시위도 많네.”
“폐하께서 허용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잘하고 있네.”
세리아가 나를 봤다.
“칭찬입니까?”
“응.”
그녀는 기분 나빠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조약은 200년.
자동갱신 없음.
150년째부터 재심협상 가능.
외교와 대외군사권은 제국.
국왕은 내정수반.
로하르군은 지역방위군으로 유지.
제국군은 7개 전략기지와 3개 항로거점 사용.
그중 A-17 관문성계의 기지는 보호국 영토가 아니라 제국 직할 군사구역으로 설정됐다.
전략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로하르 행성 대부분은 굳이 제국령으로 만들지 않았다.
제국법은 조약영역에서 우선.
일반민사와 가족법은 로하르 법 유지.
종교와 문화 자유.
노예제·연좌형 처벌·귀족의 법정특권은 단계적 폐지.
제국기업 시장진입은 10년 제한.
하원의석 2,800석 우선배정.
상원은 총 150표를 유지하므로 로하르가 새 표를 따로 늘리는 방식은 아니었다. 외부권역 배정분 가운데 1표를 로하르 포함 권역대표로 재배정하고, 후보는 정식 제국 시민만 가능했다.
로하르인은 자동으로 제국 시민이 되지 않는다.
이 조항을 읽을 때 일부 환호가 줄었다.
사람들은 보호국이 되면 강한 제국의 시민권도 같이 얻는다고 착각하기 쉬웠다.
그건 아니었다.
보호받는 것과 제국 정치공동체의 핵심회원이 되는 것은 다르다.
◆서명은 알렌과 내가 했다.
제국 국새.
로하르 왕실인.
두 문양이 한 문서에 겹쳤다.
알렌이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걸로 로하르는 무엇이 됩니까?”
“살아남는 나라.”
“독립국입니까?”
“형식상.”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솔직하시군요.”
“실질은 제국 보호권역.”
“우리 후손들이 폐하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합니다.”
“나도.”
“구원자.”
“좋네.”
“정복자.”
“그럴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정확할지도 몰랐다.
◆서명식 뒤 첫 명령은 의외로 군사와 관계없었다.
[로하르 보호국 의료개도 20년 계획]
왕국 병원망을 5등급으로 나눠 가장 낮은 지역부터 끌어올린다.
제국 최신의료는 제한적으로만 사용.
대신 로하르가 20년 뒤 자기 손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술체계를 만든다.
두 번째.
[기초교육·공학교육 공동개편]
세 번째.
[전쟁피해지역 재건]
그 뒤에 군 개편이 왔다.
전쟁을 끝낸 다음 사람들이 달라진 삶을 바로 느끼지 못하면 보호는 종이 위 단어에 불과했다.
◆그날 밤 벨하임 거리를 잠깐 걸었다.
물론 근위대가 주변을 다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반시민 사이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한 음식점 앞에서 주인이 나를 보더니 멈췄다.
“황제… 닮았네.”
나는 대답했다.
“그 말 오늘 두 번째 듣는데.”
주인이 웃었다.
“진짜 황제면 이런 데 안 오겠죠.”
뒤에서 카시안이 나타났다.
주인의 웃음이 멈췄다.
“폐하.”
“왜 항상 내가 먹으려 하면 나타나?”
“독성검사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냥 음식 하나 줘.”
“뭘… 무엇을 드릴까요?”
“제일 많이 파는 거.”
그날 로하르 보호국 첫날 밤.
나는 왕궁 만찬보다 길거리 수프를 먹었다.
다음 날 그 가게는 줄이 3킬로미터 생겼다.
◆보호조약 서명 뒤 로하르 왕실의 지위도 달라졌다.
알렌 4세는 여전히 ‘국왕’이었다.
국내의전상 최고지위.
하지만 제국법상으로는 보호국 내정수반.
황제와 동급 군주가 아니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두고 왕궁 의전관들이 며칠 싸웠다.
제국 황실은 해결책을 내놨다.
[국내: 로하르 국왕 폐하]
[제국 공식문서: 로하르 보호국 국왕]
[황제 접견: 보호군주 예우]
알렌은 받아들였다.
“왕관은 남았지만 높이는 조금 낮아졌군요.”
“물리적으론 그대로인데.”
“폐하께서는 정말 낭만이 없습니다.”
“벌써 세 번째 듣네.”
◆보호국 첫날 가장 바쁜 곳은 국경이 아니라 세관이었다.
제국 상품 수천 종류가 들어오려 했다.
로하르 관료들은 인증규격부터 달라 혼란에 빠졌다.
전압.
주파수.
식품표시.
의약품 안전기준.
화물컨테이너 규격.
심지어 나사산 규격까지 달랐다.
제국 표준청은 즉시 10년 전환계획을 만들었다.
“전부 제국규격으로 바꿉니까?”
로하르 산업대신이 물었다.
“장기적으로.”
“우리 규격은 사라지고.”
“쓸 만한 건 병행.”
“누가 판단합니까?”
“공동표준위원회.”
대부분은 제국방식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국시장에 물건을 팔려면 제국규격을 맞추는 편이 훨씬 이익이었다.
법으로 강제하기 전에 경제가 먼저 통합했다.
◆내가 길거리 수프를 먹은 사건은 예상보다 오래 갔다.
가게 주인은 다음 날부터 메뉴 이름을 바꿨다.
[황제가 먹은 국물]
로하르 왕실은 너무 노골적이라고 지적했다.
주인은 간판을 바꿨다.
[어제 아주 높은 분이 드신 국물]
더 잘 팔렸다.
본토 관광객까지 몰려왔다.
세리아가 나를 만나자마자 말했다.
“폐하 때문에 벨하임 임대료가 또 올랐습니다.”
“수프 한 그릇 먹었는데.”
“황제가 드셨습니다.”
“황제도 밥은 먹어.”
“그걸 상품화하는 게 문제죠.”
제국의 팽창은 이런 식으로도 흔적을 남겼다.
정책문서가 아니라 식당 간판에.
◆보호조약 발효와 동시에 로하르군 최고지휘권 구조도 바뀌었다.
평시에는 국왕과 로하르 국방부.
대규모 외부위협이나 제국 전시동원 때는 제국 통합사령부.
이중구조였다.
테렌 바르크는 처음에 강하게 반발했다.
“내 함대에 외국인이 최종명령을 내린다.”
아델라인이 말했다.
“보호국이니까.”
“그 말 하나로 끝냅니까?”
“전쟁권을 넘겼다는 게 그 뜻이다.”
테렌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래도 로하르군 자체는 남았다.
제국은 그들의 제복과 계급도 유지시켰다.
장기적으로 제국 지역군과 호환되도록 바꿀 뿐이었다.
현지 군대가 사라지면 자존심만 문제가 아니었다.
치안과 구조, 재난대응까지 제국군이 떠맡아야 했다.
그건 비효율적이었다.
◆조약문은 436개 조항이었다.
로하르 대표단은 절반쯤 읽고 지쳤다.
제국 법무관은 아직 부속서가 남았다고 했다.
세리아가 머리를 짚었다.
“보호받는 데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이 필요합니까?”
법무관이 답했다.
“권한을 빼앗는 것보다 남겨두는 권한을 정확히 적는 게 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로하르 왕국은 학교 교과내용을 어디까지 정할 수 있는가.
지역경찰은 제국 시민을 체포할 수 있는가.
국왕은 외국 귀족과 혼인협정을 맺을 수 있는가.
로하르 회사가 다른 보호국에 지점을 열 때 누구 허가를 받는가.
성간환경규정은 제국법과 현지법 중 무엇을 우선하는가.
제국주의는 지도에 색칠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매일 누가 어떤 도장을 찍는지 정하는 일이었다.
◆가장 오래 싸운 건 최고사법권이었다.
세리아는 로하르 대법원이 최종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은 제국법·시민권·전략자원·권역간 분쟁은 제국 최고법원이 최종심이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이중구조가 만들어졌다.
순수한 로하르 민사·형사 사건은 로하르 대법원.
제국권한과 충돌하는 사건은 제국권역법원.
“자치가 생각보다 좁군요.”
세리아가 말했다.
“처음부터 넓다고 한 적 없어.”
그녀가 나를 노려봤다.
나는 덧붙였다.
“대신 남겨둔 건 실제로 지킬 거야.”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고 뒤에서 통제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경계를 분명히 하는 편이 나았다.
◆조약 체결식이 끝난 뒤 알렌은 왕관을 벗지 않았다.
그게 중요했다.
그는 여전히 로하르의 왕이었다.
다만 이제 별 사이의 전쟁을 결정하는 왕은 아니었다.
그 변화가 보호국의 본질이었다.
◆조약이 발효된 첫날 로하르 외무부 현판은 그대로 남았다.
다만 업무가 바뀌었다.
독자적인 조약체결은 할 수 없었다.
대신 제국 외교망 안에서 통상사무, 문화교류, 해외 로하르인의 보호를 맡았다.
외무부 장관은 농담했다.
“부처는 살아남았는데 외교권은 죽었군요.”
마리안이 답했다.
“업무가 바뀐 겁니다.”
기관도 사람처럼 새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보호조약 원본은 로하르어와 제국어 두 언어로 동등한 효력을 갖게 했다.
번역문이 부속본이 아니라 정본이었다.
작은 조항이었지만 로하르 법학계는 크게 환영했다.
자치가 좁더라도 자기 언어로 법을 읽을 권리까지 넘긴 것은 아니었다.
◆조약 첫 주에 로하르 화폐가 급등했다.
사람들이 전쟁종결과 제국보증을 믿고 돈을 사들인 탓이었다.
너무 빨리 올라 수출기업이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제국 재무원은 시장개입을 제안받았지만 최소한만 했다.
“그냥 제국통화 쓰면 안 됩니까?”
에리안이 물었다.
“안 돼.”
“왜요?”
“경제체력이 다른데 같은 돈 쓰면 통화정책을 못 해.”
로하르 화폐는 최소 50년 유지하기로 했다.
통합은 빠를수록 좋은 게 아니었다.
가끔은 일부러 느리게 가는 게 더 제국적이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