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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12화 — 왕과 황제

별의 제국 · 12 / 290약 8분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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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르 수도 벨하임은 오래된 도시였다.

행성개척 초기부터 60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킨 도시.

왕궁은 고전적인 석재외벽과 현대식 방어장을 억지로 결합한 모습이었다.

마리안 세르는 제국 조사단보다 하루 먼저 벨하임에 도착했다.

외무원장 직접 방문.

로하르 언론은 그것만으로도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그녀를 황족이라고 오해한 방송도 있었다.

아틀라스 제국에서는 황족이 아니라 고위관료라고 정정했지만, 로하르 사람들에게 350세 외무원장이 황제 직속으로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다.

왕궁 앞에는 두 종류의 시위대가 있었다.

[제국의 보호를 요청한다]

[로하르의 주권을 지켜라]

같은 광장 양쪽에서 소리쳤다.

마리안은 둘 다 지나쳤다.

“막지 않습니까?”

로하르 의전관이 물었다.

“왜 막습니까?”

“외국 사절 앞에서 왕국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국가가 무너지진 않겠죠.”

의전관은 조금 당황했다.

제국은 강한 황권을 가진 나라였지만 사적 발언과 정치적 비판은 상당히 자유로웠다.

황제를 모욕했다고 잡아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명령을 거부하거나 반역하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알렌 4세와의 대면회담은 황궁이 아닌 로하르 왕궁에서 진행됐다.

나는 홀로그램으로 참석했다.

알렌이 내 실물 크기 영상을 보며 말했다.

“직접 오시지 않는군요.”

“아직은.”

“위험해서입니까?”

“아니.”

“그럼?”

“황제가 보호국 후보국마다 직접 가기 시작하면 의전규칙이 이상해지니까.”

회의실 몇 명의 표정이 굳었다.

알렌은 오히려 웃었다.

“아직 후보라고 하셨는데 이미 보호국이라고 부르시는군요.”

“실수했네.”

“의도적인 실수로 들립니다.”

“국왕은 눈치가 빨라서 좋아.”

마리안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또 말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회담은 네 시간 이어졌다.

제국은 로하르의 모든 기초자료를 요구했다.

인구.

세금.

군수공장.

귀족령.

교육.

병원.

교통망.

범죄율.

곡물비축량.

왕실재산.

국가부채.

현역함대.

예비군.

행성별 종족구성.

로하르 측 재무대신이 결국 물었다.

“침공군도 이렇게까지 조사합니까?”

마리안이 답했다.

“직접통치를 검토한다면 더 많이 조사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마리안도 제국 사람이었다.

표현만 부드러웠지 내용은 나보다 더 차가울 때가 있었다.

보호국 조건은 아직 공식 제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로하르 왕실은 이미 자체적으로 예상안을 만들고 있었다.

외교권 상실.

제국군 주둔.

군 지휘권 제한.

전략기술 통제.

대외무역 일부 통제.

대신 세르마크로부터의 완전한 안전보장.

제국 시장 접근.

의료·산업지원.

항로안정.

알렌이 물었다.

“우리 왕실은 유지됩니까?”

“유능하면.”

“왕조의 존속이 능력평가 대상입니까?”

“제국 가문도 그래.”

나는 설명했다.

아틀라스 제국의 공식 가문명은 영원한 혈통특권이 아니었다.

가문이 수백 년 공훈을 잃고 부패하면 이름사용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귀족작위도 마찬가지였다.

대단절 이후 부패청산 때 실제로 여러 유서 깊은 집안이 사라졌다.

알렌은 신기하다는 듯 들었다.

“우리 왕실은 800년 이어졌습니다.”

“좋은 기록이네.”

“제국에서는 800년도 짧습니까?”

“사람이 천 년 사는데.”

알렌이 말문을 잃었다.

수명의 차이는 정치제도 차이보다 더 컸다.

로하르 왕조 전체 역사보다 오래 산 아틀라스인이 실제로 존재했다.

회담 중 제2왕자 에리안이 직접 질문했다.

“보호국이 되면 로하르인은 제국 시민이 됩니까?”

“아니.”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에리안이 놀랐다.

“왜입니까?”

“보호받는 것과 제국 시민공동체에 들어오는 건 다른 일이니까.”

“왕족도?”

“당연히.”

“공로를 세우면?”

“개인은 신청할 수 있습니다.”

마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비아틀라스인의 정식 시민권은 극도로 어려웠다.

돈으로 살 수 없다.

왕이라고 자동취득되지 않는다.

수십~수백 년 공직봉사.

제국에 대한 중대한 공훈.

문화·법적 통합.

안보심사.

그리고 종족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

에리안이 말했다.

“왕족보다 평민 영웅이 더 쉽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 평민이 충분히 뛰어나다면.”

로하르 귀족 몇 명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들에게는 낯선 가치였다.

제국이 평등한 나라는 아니었다.

오히려 위계가 강했다.

다만 그 위계를 혈통 하나로 고정하지 않았다.

회담 마지막에 알렌이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는 받아들였다.

영상실에서 왕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로하르를 정복하고 싶으십니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

“정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군대를 보내고 외교권을 빼앗는 것.”

“그럴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렌은 예상했는지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왕실을 남기려 하십니까?”

“잘하고 있으니까.”

“그게 전부입니까?”

“통치비용도 싸고.”

국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단히 낭만 없는 답변이군요.”

“황제 일은 낭만으로 하면 망해.”

“로하르가 보호를 거부하고 독립을 유지하겠다면?”

나는 그를 바라봤다.

“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않고, 민간질서를 지키고, 제국 항로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면 일정 기간은 가능하겠죠.”

“일정 기간.”

“제국은 장기적으로 회랑 전체가 안정된 하나의 질서 안에 있는 편을 선호합니다.”

“그 질서는 제국이 정하고.”

“맞습니다.”

알렌은 한참 말이 없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거짓말하면 나중에 더 귀찮아져.”

그날부터 로하르 왕실은 제국의 의도를 정확히 알게 됐다.

우리는 구원자일 수 있었다.

동시에 주권을 가져갈 국가이기도 했다.

로하르 왕궁 내부는 제국 조사단에게 또 다른 공부거리였다.

왕실의전은 지나치게 길었고.

귀족서열은 복잡했으며.

회의석상에서 누가 먼저 말하는지까지 법에 가까운 관습이 있었다.

제국 관료들은 처음 이틀 동안 실수만 했다.

한 행정관이 후작보다 먼저 문을 통과해 논란이 됐고.

마리안은 왕비에게 악수부터 청했다가 의전관들을 당황하게 했다.

“사과해야 합니까?”

마리안이 물었다.

로하르 의전대신이 답했다.

“법 위반은 아닙니다.”

“그럼 됐군요.”

그녀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문화는 존중하지만 비효율적인 의전까지 그대로 배울 생각은 없었다.

며칠 뒤 왕궁 쪽이 먼저 제국사절 의전규칙을 따로 만들었다.

서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렌은 나에게 왕실의 가장 민감한 자료도 공개했다.

왕실 비자금.

귀족과의 비공식 약정.

세르마크 내부 연락망.

나는 그 선택을 높게 평가했다.

“왜 여기까지 보여주지?”

알렌이 말했다.

“어차피 찾아내실 것 같아서요.”

“정답.”

“그리고 숨기다 걸리면 더 나쁠 테니까.”

“더 정답.”

왕실 비자금 일부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다.

전쟁 중 비밀공작에 쓴 돈.

반대귀족 매수.

언론지원.

제국 법 기준으로는 몇 건이 불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급처벌하지 않았다.

“보호조약 발효 전의 국내행위는 로하르 법으로 판단.”

법무원이 확인했다.

“명백한 대량학살·노예화 같은 보편금지행위 제외?”

“당연히.”

통치를 시작하면서 과거 800년을 전부 제국법으로 재판하면 나라 하나를 감옥으로 만들게 된다.

새 질서는 기준시점을 정해야 했다.

회담 뒤 알렌은 마리안에게 개인적인 질문도 했다.

“황제 폐하는 언제까지 재위하십니까?”

마리안이 잠깐 멈췄다.

“그건 황실 내부문제입니다.”

“아틀라스인은 천 년 가까이 산다고 들었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럼 폐하는 앞으로 700년 더 황제일 수도 있습니까?”

“가능성만 보면.”

알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로하르 왕은 길어야 수십 년 더 재위한다.

그가 지금 맺는 조약의 상대가 증손자 시대에도 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

그건 로하르 정치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보호국 조약 200년이 ‘황제 한 사람의 정책기간’보다 짧을 수도 있었다.

제국의 장기성은 함대보다 더 무서운 힘이었다.

왕궁조사단은 로하르 왕실 문서보관소에서 재미있는 자료를 하나 찾았다.

600년 전 첫 성간개척 당시 왕실이 지방행성에 내린 칙령.

[멀리 있는 왕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니, 현지인은 현지사정을 따라 결정할 것.]

나는 문장을 보고 웃었다.

“이거 우리 행정원 교육에 써도 되겠는데.”

알렌이 놀랐다.

“우리 조상 말을요?”

“좋잖아.”

제국 중앙집권은 모든 결정을 수도가 직접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중앙은 전쟁·외교·전략을 쥔다.

생활행정은 현지가 더 잘 안다.

로하르 왕실이 이미 600년 전에 비슷한 문제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보호국 설계에도 도움이 됐다.

현지 왕실을 없애지 않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알렌은 회담 마지막에 로하르 왕실 족보를 보여줬다.

800년 왕조.

제국 기준으로는 한 아틀라스인의 수명보다 짧을 수도 있는 시간.

“우리에겐 이게 국가의 연속성입니다.”

그가 말했다.

“이해합니다.”

“정말요?”

“우리에겐 황실이 1만 년 넘었으니까.”

알렌이 잠시 웃음을 잃었다.

수명과 역사규모 차이는 협상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이었다.

제국은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로하르는 언제나 시간의 흐름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왕실 의전국은 회담 뒤 황제 호칭만 열두 번 수정했다.

‘폐하’, ‘대황제’, ‘성간제국 황제’, ‘아틀라스의 군주’.

마리안은 전부 지우고 하나만 남겼다.

“폐하면 됩니다.”

강한 국가는 호칭을 늘려 위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로하르 왕실은 제국 조사단이 떠난 뒤 처음으로 ‘보호국 이후 왕실’이라는 내부문서를 만들었다.

국왕은 외교군주에서 내정군주로 바뀐다.

왕세자는 제국정치와 행정을 배워야 한다.

왕녀·왕자는 군 고위직보다 지방행정·외교연락·문화정책을 맡는 편이 유리하다.

알렌은 자녀들에게 말했다.

“왕관이 남는다고 예전과 같은 왕은 아니다.”

에리안은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세리아는 오히려 말했다.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보호국화는 조약 한 장으로 왕실의 역할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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