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9화 — 문명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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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마크 함대 400척은 평가함대 쪽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국경성계에 모여 전투배치를 했다.
위협시위였다.
라울은 즉시 한 줄 평가를 올렸다.
[군사적으로 의미 없음. 정치적으로 의미 있음.]
정확했다.
제국 전투순양함 한 척이 저 함대 전체보다 강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세르마크 지도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는 400척이 충분히 큰 숫자였다.
나는 그 오판을 비웃지 않았다.
정보가 없으면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정보를 줬는데도 고집하는 순간부터다.
◆중앙문명평가원이 첫 종합보고를 냈다.
[로하르 왕국: V+]
[세르마크 군정연합: VI-]
[벨로아 상업연맹: V]
[카르디아 제후권: V]
[엘리시온 회랑 전체: VI급 문명권 미달]
나는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물었다.
“세르마크가 왜 로하르보다 높지?”
평가원장이 답했다.
“군수산업, 함대규모, 항행기술, 동원능력이 더 높습니다.”
“행정.”
“로하르 우위.”
“교육.”
“비슷합니다. 세르마크는 군사·공학 집중도가 높습니다.”
“민간생활.”
“로하르 우위.”
“그럼 총체적으로 VI-.”
“예.”
등급은 도덕점수가 아니었다.
독재국이라고 기술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민주적이라고 산업력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문명은 복합체였다.
세르마크는 자유가 적고 군사동원이 강했다.
그 대신 군수기술과 조직력이 좋았다.
로하르는 더 자유롭고 민간경제가 발달했지만 전쟁동원에서는 느렸다.
둘 다 장점이 있었다.
둘 다 제국과 비교하면 낮았다.
“정책분류.”
평가원장이 말했다.
“제국 기준상 IV~V는 개도·편입 대상. VI는 지역강국으로 협상 가능하나 장기 보호권 편입 권고.”
“즉.”
“둘 다 완전 대등외교 대상은 아닙니다.”
마리안이 옆에서 덧붙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다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아.”
나는 보고서를 넘겼다.
“세르마크 사회에서 쓸 만한 건?”
질문에 몇몇 사람이 나를 봤다.
“왜?”
“적대국 평가부터 하실 줄 알았습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쓸 만한 건 먼저 봐야지.”
평가원장이 자료를 띄웠다.
“군 행정구역 간 성과경쟁제도가 흥미롭습니다. 각 군정구가 생산·교육·징병·연구목표를 경쟁하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통계조작이 심합니다.”
회의실에서 웃음이 조금 나왔다.
“그건 우리도 예전에 했어.”
나는 말했다.
“경쟁구조는 가져오고 숫자조작은 버려.”
“검토하겠습니다.”
“로하르.”
“분산신분복구망.”
“그것도.”
제국은 상대를 낮게 본다고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낮은 문명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더 흥미로웠다.
‘저 기술수준에서도 이런 해결책을 만들었군.’
그럼 가져와서 제국 수준으로 키우면 된다.
◆마리안이 별도로 외교정책안을 올렸다.
1안.
완전중립.
양국과 수교하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음.
2안.
제한중재.
민간회랑만 보호.
3안.
강제정전.
제국이 전쟁중지선을 설정하고 양국 군사행동을 제한.
4안.
제국권 편입.
로하르와 세르마크를 각각 보호국·감독국 형태로 재편.
나는 1안을 바로 지웠다.
마리안이 물었다.
“검토도 안 하십니까?”
“73년 싸웠잖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옆에 서서 계속 보자고?”
2안도 지웠다.
“민간회랑만 지키면 전쟁은 계속돼.”
3안에 표시했다.
“우선 이거.”
그리고 4안 옆에 보류표시.
“다음이 이거.”
마리안이 말했다.
“순서가 매우 빠릅니다.”
“문명격차가 크니까.”
“현지에서는 침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에도?”
“73년간 수십억 죽은 체제를 그대로 두는 것보다 나으면.”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제께서는 스스로를 정복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럼 보호자?”
“그것도 상황 따라.”
나는 지도를 가리켰다.
“난 그냥 이게 더 낫다고 생각해.”
“무엇이요?”
“전쟁을 끝내고, 의료를 올리고, 교육을 올리고, 항로를 안정시키고, 그 대신 중요한 권한은 우리가 가져가는 것.”
“그게 제국주의의 전형적 논리라는 건 아십니까?”
“알아.”
“그래도 하시겠다고.”
“응.”
마리안이 아주 작게 웃었다.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으십니다.”
◆그날 오후.
세르마크의 두 번째 메시지가 왔다.
[외부세력이 로하르를 지원할 경우 이를 적대행위로 간주한다.]
그리고 로하르의 긴급통신도 동시에 들어왔다.
세르마크 제4전선군이 국경에 1,100척을 집결.
로하르도 맞대응.
전투가 시작되면 민간행성 세 곳이 사정권에 들어갔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마리안.”
“예.”
“양국에 통보해.”
“어떤 내용으로요?”
“12시간 뒤부터 전쟁중지선 발효.”
그녀가 나를 똑바로 봤다.
“양국 합의 없이요?”
“응.”
“세르마크가 거부할 겁니다.”
“그럼 함대가 없어지겠지.”
“로하르가 거부하면?”
“똑같이.”
마리안은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명령문 마지막 줄을 직접 적었다.
[제국은 귀국의 체면을 존중한다.]
[그러나 민간인과 항로안정을 체면보다 우선한다.]
[12시간 후 지정선을 넘는 모든 교전함정은 국적에 관계없이 무장해제한다.]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전쟁을 끝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등급 자체를 공개할 것인지도 논쟁이었다.
제국 내부에서는 흔한 분류였다.
그러나 외국에게 “당신들은 V급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모욕이 될 수 있었다.
마리안은 비공개를 권했다.
“적어도 초기에는요.”
나는 동의했다.
“굳이 숫자로 약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
“의외로 배려하시는군요.”
“말 안 해도 알게 될 텐데.”
“그 뒤 문장이 문제입니다.”
등급은 제국의 정책도구였다.
VI 이하라면 보호·개도·편입이 기본.
VII라면 협상비중을 높이고.
VIII라면 대등외교.
하지만 실제 우주에서 완전한 VIII급은 극히 드물 것으로 예상됐다.
오르테가가 말했다.
“특정 기술만 VIII급인 문명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처음에는 동급으로 오판할 수 있죠.”
“산업력 보면 금방 나오잖아.”
“예. 공간공학은 우리와 비슷한데 성계가 20개뿐인 식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국가는 기술파트너일 수는 있어도 총체적 경쟁자는 아니다.
제국은 기술 하나에 놀랐다고 국가 전체를 동급으로 승격시키지 않았다.
◆하원 자유권파의 대표의원 레아 폰트는 황제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제국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타국의 주권을 상대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터뷰가 끝난 뒤 기자가 내게 반응을 물었다.
나는 답했다.
“맞는 위험입니다.”
기자가 당황했다.
“그러면 정책을 바꾸실 겁니까?”
“아니요.”
“왜요?”
“반대쪽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하니까.”
73년 전쟁.
수십억 민간피해.
끝낼 능력이 없는 국가 둘.
나는 그 상태를 ‘주권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봤다.
중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현 상태가 계속되도록 허용하는 결정이었다.
“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자가 물었다.
“당연히.”
“그럼?”
“그래서 의회와 법원과 언론이 있는 겁니다.”
황제가 강하다고 황제가 항상 옳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도망치지 않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전쟁중지선 선포 전날 밤, 알렌에게 비공개로 한 번 더 알렸다.
“내일 양국 함대에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알렌이 물었다.
“로하르군이 실수로 선을 넘으면?”
“무장해제.”
“우리도?”
“그래야 세르마크가 믿지.”
“제국은 우리 편이 될 생각이 없다?”
“보호국이 되기 전까지는.”
알렌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전쟁중지선은 중립선이 아니었다.
제국이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그은 첫 선이었다.
◆전쟁중지선 좌표는 군사적으로도 절묘하게 잡혔다.
양측 모두 자기가 완전히 손해봤다고 주장할 수 없는 선.
동시에 민간행성 세 곳을 중화구역으로 묶는 선.
아델라인이 직접 설계했다.
“왜 여기까지 로하르한테 양보했어?”
내가 물었다.
“철수하기 쉬운 쪽이 로하르니까요.”
“정치적 공평 말고 실행가능성?”
“예. 선은 아름답게 그리는 게 아니라 지킬 수 있게 그립니다.”
그 말은 나중에 제국 보호권역 군사학교 교재 첫 장에 들어갔다.
◆전쟁중지선 명령을 송신하기 직전 나는 문구 하나를 수정했다.
[제국은 양국의 영예를 존중한다.]
처음 초안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영예’를 ‘존엄’으로 바꿨다.
마리안이 이유를 물었다.
“영예 때문에 73년 싸웠잖아.”
“존엄은 다릅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지켜줘야지. 국가 체면은 필요하면 꺾어도 되고.”
그 차이는 앞으로 보호권역 정책에서 반복됐다.
개인의 존엄은 보호.
국가의 허영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문명등급 보고서에는 별도 주석도 붙었다.
[등급은 도덕성·문화적 가치·개인의 존엄을 평가하지 않는다.]
오르테가가 직접 넣은 문장이었다.
“V급이면 미개하다는 뜻 아닙니까?”
한 젊은 관료가 물었다.
그가 답했다.
“기술적으로 뒤처졌다는 뜻이지. 음악까지 못 만든다는 뜻은 아닐세.”
제국은 계급을 매겼다.
하지만 숫자가 모든 가치를 설명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 구분을 잊는 순간 개도정책은 약탈이 되기 쉬웠다.
◆평가등급은 내부문서였다.
로하르나 세르마크에 대고 ‘당신들은 V급이다’라고 통보하지 않았다.
등급은 정책을 정하기 위한 제국의 도구였지 상대를 모욕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그 차이를 모든 외교관에게 다시 교육시켰다.
◆명령 발효를 앞두고 양국 민간방송은 카운트다운을 했다.
로하르에서는 ‘전쟁이 멈추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세르마크에서는 ‘외세간섭 개시시간’이라고 불렀다.
같은 시각이 완전히 다른 이름을 가졌다.
나는 두 방송을 나란히 봤다.
역사는 원래 한 화면으로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일은 그 서로 다른 화면 위에 실제로 작동하는 규칙 하나를 얹는 일이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