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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8화 — 로하르 왕국

별의 제국 · 8 / 290약 8분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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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벨이 제공한 로하르 정보는 생각보다 체계적이었다.

왕국이라 해서 봉건제 수준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성간국가가 될 정도면 어떤 형태로든 복잡한 행정이 필요하다.

그래도 로하르는 꽤 특이했다.

국왕.

귀족평의회.

선출 국민의회.

행성정부.

분산신분망.

왕실 권한이 강했지만 모든 것을 왕이 직접 결정하지는 않았다.

“제법이네.”

내 말에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V급 문명치고 행정분산이 잘 되어 있습니다.”

“신분망은 특히.”

로하르의 중앙데이터센터 몇 곳이 파괴돼도 지방노드에서 시민 신원을 복원할 수 있었다.

기술 자체는 제국보다 낮았다.

하지만 발상은 좋았다.

오르테가가 말했다.

“본토 재난복구망에도 일부 참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웃었다.

“또 가져올 거 생겼네.”

제국은 낮은 문명에서 배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전체수준이 낮다고 모든 아이디어가 낮은 것은 아니다.

좋은 건 가져오고 더 잘 만들면 된다.

그게 제국식 우월주의였다.

‘우리가 우월하니 남의 것을 볼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우리가 우월하니 좋은 건 전부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첫 정식 화상회담에는 로하르 국왕 알렌 4세가 나왔다.

6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실제나이는 84세였다.

로하르인의 평균수명은 약 140년.

그들 기준으로는 중년 후반.

국왕 뒤에는 왕세자와 대신, 군 지휘관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황제정복을 입지 않았다.

일반 집무복.

그래도 황실문장과 내 얼굴을 본 순간 상대편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이미 내 정보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알렌이 먼저 말했다.

“아틀라스 제국 황제 폐하께 로하르 왕국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난민 구조는 별개로 보상받을 일은 아닙니다.”

통역AI가 의미를 다듬어 전달했다.

“다만 상황을 알아야겠습니다.”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묻으십시오.”

나는 바로 본론으로 갔다.

“73년 전쟁을 끝낼 의지가 있습니까?”

로하르 쪽 인물 몇 명의 표정이 굳었다.

알렌은 잠깐 침묵하다 답했다.

“있습니다.”

“조건은?”

“세르마크가 점령한 8개 국경성계 반환. 민간인 포로 송환. 전쟁배상 일부. 국경안전보장.”

“세르마크가 받을까?”

“그들이 먼저 침공했습니다.”

“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알렌이 나를 봤다.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끝낼 능력은?”

“…현재는 부족합니다.”

솔직했다.

나는 그 점을 높게 봤다.

“좋습니다.”

알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국은 중재를 고려하십니까?”

“중재만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뜻은.”

“회랑전쟁 전체를 평가 중입니다.”

로하르 쪽 군인이 입을 열었다.

“회랑전쟁은 우리와 세르마크 사이의 문제입니다.”

외무대신이 급히 그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었다.

“이름이?”

“테렌 바르크. 왕국 해군대장입니다.”

“바르크 제독. 국경 밖으로 난민이 도망치고, 추격함이 우리가 구조 중인 배를 공격했습니다.”

“그건 세르마크의 행위입니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 문제이기도 합니다.”

테렌이 입을 다물었다.

알렌이 물었다.

“제국이 무엇을 원하십니까?”

좋은 질문이었다.

영토.

자원.

항로.

충성.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지금은 사실.”

“그 다음은요?”

“질서.”

알렌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단어가 가벼운 뜻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다.

회담이 끝난 뒤 마리안이 말했다.

“알렌 4세는 괜찮은 통치자입니다.”

“나도 그렇게 봤어.”

“보호국으로 두기 좋은 유형입니다.”

나는 그녀를 봤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폐하께서 물으실 것 같아서 미리 답한 겁니다.”

“역시 유능해.”

로하르 분석은 빠르게 진행됐다.

인구 860억.

17개 주요 정착성계.

34개 부분개척성계.

총생산은 본토 중형행성권 몇 개 정도.

군사력은 세르마크보다 약했다.

하지만 행정과 민간교육은 오히려 나았다.

귀족제가 남아 있었으나 왕실이 귀족을 어느 정도 통제했다.

선출의회도 장식물이 아니었다.

부패는 있었다.

심각했지만 국가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직할할 필요는 없겠군.”

세라가 물었다.

“벌써 편입형태를 생각하십니까?”

“통치비용 계산은 미리 해야지.”

로하르를 정식 제국령으로 만들 이유는 현재 없었다.

아틀라스인 정착자도 없고.

전략자원도 아직 특별하지 않고.

항로가 중요하긴 하지만 왕국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왕실을 살려 두는 게 싸고 효율적이었다.

외교와 국방을 제국이 가져가고.

현지행정은 왕국이 맡는다.

필요하면 통화·사법·교육을 단계적으로 맞추면 된다.

보호국.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다만 아직 알렌에게 말할 때는 아니었다.

세르마크부터 봐야 했다.

그날 밤.

세르마크가 첫 공식통신을 보내왔다.

[미확인 외부세력에게 통보한다.]

[로하르 반역선 인도를 요구한다.]

[세르마크 군정연합의 주권과 군사작전을 방해하지 말라.]

나는 세라와 함께 메시지를 읽었다.

“자신감 있네.”

“우리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해는 해.”

세라가 물었다.

“답변은?”

나는 짧게 적었다.

[구조대상 인도 거부.]

[제국 평가단을 파견한다.]

[귀 연합은 회랑전쟁 관련 자료와 전투현황을 제출하라.]

세라가 읽고 나를 봤다.

“요청이 아니라 명령처럼 보입니다.”

“명령 맞아.”

“아직 세르마크는 제국 소속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면 되지.”

세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세르마크는 자료제출을 거부했다.

그리고 국경에 함대 400척을 집결시켰다.

나는 보고서를 읽으며 생각했다.

평가가 빨라질 것 같았다.

로하르에 대한 제국의 첫 내부평가는 단순한 군사분석을 넘어갔다.

사회안정도.

지방행정효율.

귀족특권의 강도.

빈곤율.

산업집중도.

교육격차.

종교분포.

정부에 대한 신뢰.

제국은 보호국화를 검토하는 국가를 기업 인수하듯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함께 살아야 할 지역을 새 행정권역처럼 분석했다.

“국왕 지지율 61퍼센트.”

세라가 읽었다.

“전쟁 중 국가치고 높네.”

“왕실이 직접 전쟁세를 감면한 영향이 큽니다.”

“귀족평의회는?”

“28퍼센트.”

“낮네.”

“부패사건이 많습니다.”

“국민의회.”

“47.”

나는 수치를 기억했다.

보호국화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누구를 남길지였다.

왕실은 남겨도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귀족평의회는 손볼 필요가 있었다.

국민의회는 키울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복은 함대를 부수는 일이 아니라 조직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었다.

제국 생물학자들은 로하르인의 수명에도 관심을 보였다.

평균 140년.

자연상태에서는 더 짧았고 현대의료로 늘어난 수명이었다.

아틀라스인의 900~1,100년에 비하면 짧았다.

이 차이는 보호통치의 모든 것에 영향을 줬다.

200년 조약은 아틀라스인에게 정책 한 세대.

로하르인에게는 여러 세대였다.

제국 관료 하나가 300년 같은 자리에 근무하는 동안 로하르에서는 왕조가 바뀔 수도 있었다.

“현지관료 순환주기를 따로 설계해야 합니다.”

행정원이 말했다.

“왜?”

“제국 총독이 200년 그대로 있으면 현지인 입장에서는 사실상 불사자 통치가 됩니다.”

“문제야?”

“권력관계가 지나치게 개인화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었다.

나는 보호국 주재 제국고위관료의 임기를 25년 단위로 검토하게 했다.

아틀라스 기준으로는 짧았다.

로하르 기준으로는 충분히 길었다.

제국이 다종족을 다스린다는 건 수명차이까지 행정에 넣는 일이었다.

알렌 4세와 회담 뒤 로하르 왕실은 황제에 대한 비공개 평가를 만들었다.

에일린이 정보망으로 입수해 나에게 보여줬다.

[젊음.]

[직설적.]

[지나치게 자신감 있음.]

[거짓말 가능성 낮음.]

[타국 주권에 대한 철학적 존중 낮음.]

[개인 생명에 대한 보호성향 높음.]

[장기통치 위험도: 매우 높음.]

나는 마지막 줄에서 웃었다.

“위험도 높대.”

세라가 말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내 편 아니야?”

“제 직업은 폐하 편이지 폐하 평가를 조작하는 게 아닙니다.”

로하르가 나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나도 로하르를 보기 시작했다.

로하르 왕실은 제국의 수명자료를 확인한 뒤 후계정책부터 다시 검토했다.

알렌 4세는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폐하와 조약을 맺으면 내 손자의 손자도 같은 폐하와 협상할 수 있겠군요.”

“내가 오래 하면.”

“그게 우리에게는 상당한 압박입니다.”

“왜?”

“우리는 지도자가 바뀔 때 정책도 바뀝니다. 제국은 한 사람이 300년 같은 정책을 밀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생각해본 적 없는 시각이었다.

장수명은 제국의 기술만큼이나 외교적 우위였다.

협상상대가 몇 세대 바뀌는 동안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가진 채 기다릴 수 있었다.

로하르 추밀원에서는 내 얼굴보다 제국 지도 한 장이 더 큰 충격을 줬다.

직할성계만 천 개가 넘는다는 설명에 한 대신이 번역오류를 의심했다.

“천 개의 식민지가 아니라 천 개의 성계라고?”

통역관이 다시 확인했다.

맞았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순간부터 로하르가 고민하는 건 ‘전쟁에서 제국을 이길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이 거대한 국가와 어떤 관계를 선택해야 살아남는가’였다.

로하르 정부는 제국을 조사하다가 더 당황했다.

본토 인구가 수조 명이라는 자료.

황제가 122세인데 ‘젊다’고 불린다는 문화.

한 명의 제독이 400년 넘게 군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

그들에게는 기술보다 시간 자체가 다른 문명처럼 느껴졌다.

로하르 정보관이 보고서에 적었다.

[이 국가와 장기전은 군사적으로만 불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 세대 교체되는 동안 상대 지휘관은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알렌은 그 문장에 표시했다.

보호국 논쟁은 점점 ‘굴복하느냐’보다 ‘이런 국가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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