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40화 — 빈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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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시장 철거가 끝난 날 카엘은 광장 한가운데 섰다.
예전 거래대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쇠고리도.
목책도.
사람을 세우던 단도.
다 사라졌다.
그런데 시장은 비어 있지 않았다.
한쪽에는 일용직 등록소.
다른 쪽에는 운송업자.
음식노점.
숙박 중개.
옷수선.
작은 환전상.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마르코가 말했다.
“세입 보고 보셨습니까?”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마르코가 장부를 내밀었다.
노예시장 폐쇄 전보다 전체 시장세입이 조금 늘었다.
“벌써?”
“사람이 거래되는 것보다 사람이 거래하는 게 장사가 더 많으니까요.”
카엘은 장부를 보며 웃었다.
“이 말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기억을 돈 주고 사셔야겠습니다.”
에드윈이 다가왔다.
그는 시장 한쪽을 보고 있었다.
카엘이 물었다.
“왜 표정이 그렇습니까?”
“좋아서.”
“좋으면 웃으십시오.”
“다른 데는 아직 열려 있으니까.”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라고 부르기엔 좁았다.
그래도 승리였다.
세라가 새 등록소에서 하심을 돕고 있었다.
숫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라헴은 운송조합에 들어갔다.
해방노예 몇 명은 떠났다.
다른 도시로.
자기 선택으로.
카엘은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떠날 수 있다는 것.
영주의 허락 없이.
그날 작은 기념행사가 열렸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장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카엘은 거창한 이름을 기대했다.
‘자유시장’ 같은 것.
실제로 나온 이름은 단순했다.
남문시장.
남문 옆이라서.
카엘은 웃었다.
“그게 끝?”
리사라가 말했다.
“사람들은 매일 써야 하는 이름에 철학 안 넣어요.”
카엘은 남문시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람을 파는 시장이 사라지고 그냥 시장이 남았다.
그게 더 좋았다.
저녁에는 관저 옥상에서 도시를 봤다.
부두에서는 준설작업.
시장에는 불빛.
외곽에는 새 집.
마라벤이 조금씩 살아났다.
리사라가 와서 옆에 섰다.
“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요.”
카엘이 그녀를 봤다.
“정말?”
“네.”
“조건 없고?”
“오늘은.”
카엘은 웃었다.
“기록해둬야겠군.”
둘은 한동안 시장을 내려다봤다.
카엘이 말했다.
“처음 왔을 때는 여기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지금은요?”
“너무 많아서 문제야.”
리사라가 웃었다.
잠시 뒤 하심이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숨이 찬 얼굴.
“영주님.”
남문시장이 새 이름으로 굳어진 뒤 작은 축제가 열렸다.
카엘은 공식행사를 만들지 않았다.
상인들이 알아서 술통을 열고 길드가 음악가를 불렀다.
아이들이 철거한 노예시장 목재 일부로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카엘은 그 사실을 알고 잠시 말이 없었다.
사람을 세워 팔던 나무가 이제 춤추는 무대가 됐다.
에드윈이 말했다.
“상징 좋아하시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만든 건 좋아합니다.”
리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은 무대에 올라가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오늘은 내 행사 아니야.”
대신 시장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나이라 운송조합.
세라 등록소.
하심 서기들.
미아라 세리.
마르코 상인들.
에드윈 진료소 사람들.
카엘이 혼자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이 이번에는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리사라와 나란히 걷다가 카엘이 말했다.
“내가 없었어도 됐을까?”
리사라가 말했다.
“뭐가요?”
“이 시장.”
“아마 다른 모습으로는 있었겠죠.”
“노예시장 그대로였을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카엘은 잠시 침묵했다.
리사라가 덧붙였다.
“당신이 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게 중요했다는 뜻이에요.”
카엘은 그 정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기가 모든 걸 만들었다는 말보다.
밤이 되자 불빛이 시장을 채웠다.
카엘은 시장세입 보고를 다시 확인했다.
노예시장 폐쇄 전보다 거래건수 1.7배.
세입도 소폭 증가.
사람을 팔지 않아도 경제가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커졌다.
그건 카엘에게 꽤 중요한 증거였다.
선의와 이익이 항상 반대는 아니라는 것.
다만 그날 밤 들어온 상인 피살사건은 또 다른 사실을 보여줬다.
시장이 커지면 길도 안전해야 한다.
돈이 돌면 도적도 온다.
카엘은 지도에 빨간 점을 찍었다.
사건발생지.
내륙길.
다음 날 경비대를 보내기 전에 하심과 상인들에게 최근 사건기록을 모으게 했다.
세 건.
한 달 안에.
우연이 아니었다.
카엘은 말했다.
“도적을 잡는 것보다 먼저 왜 늘었는지 보자.”
리사라가 웃었다.
“이번에는 검부터 안 드네요.”
카엘이 대답했다.
“조금 배웠으니까.”
남문시장에서는 음악이 계속됐다.
도시 한쪽이 자유로워진 날,
다른 한쪽 길에서는 누군가 죽었다.
마라벤은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카엘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끝난 줄 알았는데.”
남문시장 축제 다음 날 카엘은 정식 보고서를 사힌에게 보냈다.
마라벤 노예시장 폐쇄 완료.
자유노동 등록 312명.
시장세입 전년 동월 대비 소폭 증가.
도망노예 보호사건 27건.
해방증서 발급 84건.
숫자는 성공처럼 보였다.
카엘은 마지막 줄에 다른 문장을 덧붙였다.
인근 영지에서 거래 지속. 왕국차원의 법개정 필요.
사힌 답장은 늦었다.
대신 라심에게서 편지가 왔다.
해안 쪽 도적·해적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정보.
상업이 커진 지역을 노린다고.
카엘은 이상하게 웃었다.
성공이 위험을 부르는구나.
리사라가 물었다.
“왜 웃어요?”
“좋아지면 문제 줄 줄 알았어.”
“누가 그런 거 가르쳤어요?”
“아무도.”
“그럼 혼자 착각한 거네요.”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카엘은 남문시장을 한 번 더 걸었다.
어제 축제 흔적.
깨진 술잔.
남은 장식.
평범하게 영업하는 가게.
사람들은 이미 어제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카엘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좋은 변화가 축제가 아니라 일상이 되는 것.
노예시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 세대가 낯설게 느낄 만큼 오래 유지되는 것.
그게 진짜 성공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려면 다음 문제도 풀어야 했다.
내륙길의 도적.
왕의 길은 아직 없었다.
카엘은 지도 위에서 항구와 내륙시장을 잇는 선을 처음 길게 바라봤다.
아직 도로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
그러나 모든 길은 처음에는 지도 위 선 하나였다.
“도적입니다.”
“어디?”
“왕의 길 쪽이 아니라 내륙길. 상인 하나가 죽었습니다.”
축제 끝 무렵, 세라는 카엘에게 작은 나무패 하나를 줬다.
남문시장 새 간판을 만들고 남은 조각.
한쪽에 서툰 글씨가 있었다.
세라.
자기가 직접 쓴 이름이었다.
카엘은 패를 받았다.
“왜 나한테?”
리사라가 물었다.
세라는 대답했다.
“처음 글 가르친 건 에드윈 신부님인데.”
세라가 웃었다.
“영주한테 자랑하고 싶대요.”
카엘도 웃었다.
“잘 썼다고 해.”
그는 나무패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다렌 부적 옆.
전쟁에서 얻은 은제 전공패보다 오히려 이런 물건이 늘어갔다.
사람에게 받은 것.
정책이 아니라 관계의 흔적.
그날 늦게 도적 사건 보고를 받았을 때 카엘은 은제 전공패가 아니라 세라 나무패를 잠깐 봤다.
자기가 지키려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는 습관처럼.
마라벤은 이제 단순히 자기 출세의 증거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기 미래를 만드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길 위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카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경비대는?”
“성 주변만 순찰합니다.”
카엘은 도시 밖 어둠을 봤다.
시장 안을 바꾸는 동안 길 밖은 그대로였다.
마라벤이 성장할수록 물건과 사람이 더 많이 움직인다.
그만큼 빼앗을 것도 많아진다.
리사라가 말했다.
“다음 문제 왔네요.”
카엘은 검을 집었다.
“그래.”
그리고 잠시 멈췄다.
“이번엔 검만 들고 가면 안 되겠지.”
하심과 리사라가 그를 봤다.
카엘은 지도부터 펼쳤다.
도적이 나타난 길.
마을.
경비초소.
상인 이동시간.
영지경영 첫 10화가 끝나고 있었다.
카엘은 이제 조금 알았다.
문제를 해결하면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해결된 문제 위에서 더 큰 문제가 자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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