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28화 — 친구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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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엘은 카스린으로 다시 불려갔다.
사힌 즉위 후 처음이었다.
왕궁은 전쟁 때와 달라져 있었다.
깨진 창문은 수리됐고.
복도에는 새 관리들이 뛰어다녔다.
그런데 사힌 얼굴은 더 피곤해 보였다.
“왕이 되면 편할 줄 알았습니다.”
카엘이 말했다.
사힌이 눈을 흘겼다.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젊은 거요.”
둘은 웃었다.
회의는 오라스 가문 문제였다.
왕실 입장에서는 카엘이 지역유력자들을 너무 빨리 압박하는 것이 부담.
카엘은 방화와 장부조작 증거를 제시했다.
사힌은 모두 읽었다.
“처벌은 맞습니다.”
“그럼?”
“문제는 처벌 다음.”
사힌은 마라벤 주변 지도를 펼쳤다.
오라스 친척가문.
염전길드.
인근 소귀족.
서로 혼인으로 연결돼 있었다.
“자네가 오라스를 완전히 부수면 이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부패를 놔두라는 겁니까?”
“아니.”
사힌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두드렸다.
“하나씩.”
카엘은 답답했다.
“그 사이 사람들은 계속 피해봅니다.”
“한 번에 다 싸우면 왕실군 보내야 합니다.”
“보내십시오.”
사힌이 카엘을 봤다.
“그 군대 급료는 누가 냅니까?”
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또 돈.
항상 돈.
사힌은 웃지 않았다.
“카엘.”
“예.”
“자네는 좋은 영주가 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대신 오래 못 갈 수도 있지.”
카엘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
“왜요?”
“옳은 걸 빨리 하려고 하니까.”
“그게 나쁩니까?”
“왕이 되고 나서 알았소.”
사힌은 의자에 기대었다.
“좋은 결정도 너무 빨리 하면 반대편이 전부 한꺼번에 친구가 되더군.”
카엘은 오라스 가문과 다른 유력자들이 연대하는 그림을 떠올렸다.
말이 됐다.
“그럼 전하는 어떻게 합니까?”
“한 놈에게 양보하고, 다른 놈한테 세금 올리고, 셋째에게 작위를 줍니다.”
“그게 정치입니까?”
“대부분.”
카엘은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힌이 웃었다.
“나도 젊을 땐 싫어했소.”
“지금은?”
“여전히 싫어.”
둘은 잠시 조용했다.
그날 저녁 둘은 왕과 영주가 아니라 예전처럼 술을 마셨다.
카엘은 마라벤 얘기를 했다.
거짓장부.
염전.
부두.
죽은 쥐.
사힌은 크게 웃었다.
“내가 엉망이라고 했잖아.”
“너무 정확해서 화납니다.”
“돌려줄래요?”
카엘은 바로 말했다.
“싫습니다.”
사힌이 잔을 들었다.
“그럼 영주 맞군.”
카엘도 잔을 들었다.
카스린에 머무는 동안 카엘은 사힌의 왕실회의를 한 번 더 참관했다.
북부 귀족이 세금인하를 요구했다.
해안도시는 해적대응을 요구.
사원은 토지면세 유지.
군부는 급료.
모두 돈을 달라고 하거나 돈을 덜 내겠다고 했다.
사힌은 하나씩 듣고 마지막에 말했다.
“왕관은 금으로 만들었는데 왜 안에서 은화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군.”
회의장이 웃었다.
카엘도.
그러나 웃음 뒤 결정은 어려웠다.
사힌은 북부세금을 일부 동결.
대신 항구관세를 소폭 올림.
군부급료는 지연하지 않음.
사원면세는 일부 유지.
누구도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회의 뒤 카엘이 물었다.
“정답이 있었습니까?”
사힌이 말했다.
“없었소.”
“그럼 뭘 기준으로?”
“오늘 제일 위험한 문제부터.”
“장기적으로는?”
“내일 또 봐야지.”
카엘은 영지에서는 모든 것을 제도화하고 싶어 했다.
사힌은 불완전한 결정을 계속 이어붙였다.
둘의 방식은 달랐다.
카엘이 말했다.
“전하 방식은 너무 임시적입니다.”
사힌이 웃었다.
“자네 방식은 세상이 너무 오래 기다려줄 거라 믿고.”
둘은 서로를 봤다.
싸움이 아니라 차이였다.
사힌이 말했다.
“언젠가 자네가 더 큰 걸 맡으면 알게 될 거요.”
카엘은 비웃었다.
“마라벤도 이미 벅찹니다.”
“그래서 하는 말.”
카엘은 그 예언을 믿지 않았다.
그날 돌아가기 전 사힌은 제한재판권 문서를 직접 봉인했다.
카엘에게 건네며 말했다.
“권한은 칼과 같소.”
“잘 쓰라는 말입니까?”
“아니.”
사힌은 고개를 저었다.
“손에 오래 들고 있으면 자기 손인 줄 안다는 말.”
카엘은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수십 년 뒤에야 제대로 알게 된다.
카스린에서 돌아오는 길 카엘은 사힌이 준 재판권 문서를 여러 번 읽었다.
문구는 넓었다.
마라벤 변경의 안정과 공익을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지역관습과 제국특례를 조정할 수 있다.
리사라가 말했다.
“좋은 문구네요.”
“왜?”
“애매해서.”
카엘은 웃었다.
“법률가는 애매한 걸 좋아하나?”
“정치인은 좋아하죠.”
카엘은 문서를 접었다.
“이걸 넓게 해석하면 뭐든 할 수 있겠는데.”
리사라가 바로 말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해요.”
카엘은 사힌의 말이 떠올랐다.
권한은 오래 들고 있으면 자기 손인 줄 안다.
그는 문서 뒷면에 자기 규칙을 적었다.
1. 기존 법으로 해결 가능하면 기존 법 사용.
2. 새 규칙은 공개.
3. 세금·재산권 변경은 기록.
4. 긴급명령은 기간 설정.
리사라가 봤다.
“누가 시켰어요?”
“나.”
“자기 권한을 자기가 제한한다고?”
“나중에 내가 잊을까 봐.”
리사라는 한동안 그를 봤다.
“이건 꼭 보관해요.”
“왜?”
“언젠가 보여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카엘은 웃었다.
그 종이는 훗날 마라벤 행정법의 첫 원칙 중 하나로 인용된다.
그때는 말 위에서 급하게 적은 메모였을 뿐이었다.
“전하도 왕 같습니다.”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밤이 깊어지자 사힌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라벤에 제한적 재판자치권을 더 주겠소.”
카엘은 놀랐다.
“왜?”
“자네가 사고 칠 때마다 카스린까지 와서 설명 듣기 싫어서.”
“좋은 이유네요.”
“대신.”
역시 대가가 있었다.
“해안방위 민병을 자네 비용으로 일부 유지해.”
카엘은 계산했다.
비쌌다.
하지만 권한도 필요했다.
“받겠습니다.”
사힌이 손을 내밀었다.
카엘이 잡았다.
친구와 왕.
둘은 동시에 존재했다.
카엘은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친구에게 받은 권한도 결국 계약이었다.
호의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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