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20화 — 승리의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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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가장 바쁜 사람은 병사가 아니었다.
서기관이었다.
카스린 왕궁 복도에는 문서를 들고 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군대 해산명부.
포로교환.
세금유예.
피해복구.
귀족 재확인.
상단 계약.
제국과의 조약.
카엘도 전쟁 때보다 더 많은 회의에 끌려다녔다.
“왜 제가 여기 있습니까?”
그가 사힌에게 물었다.
“마라벤 영주니까.”
“아직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문서상으로는 당신 땅입니다.”
카엘은 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동시에 무거웠다.
마라벤 관련 서류가 첫날부터 산더미였다.
세입 체납.
항구 퇴적.
염전권 분쟁.
도적 신고.
세리 횡령 의혹.
카엘은 한 장씩 넘겼다.
“보상 맞습니까?”
리사라가 옆에서 웃었다.
“이제 알아차렸어요?”
그런데 더 큰 회의가 있었다.
사하르와 아르케시아의 전후 조약 최종서명.
카엘은 하급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긴 탁자.
두 나라 문장.
사힌.
제국 사절.
왕실 재무관.
교회 대표.
상단 대표.
문서는 두 언어로 작성됐다.
리사라는 번역 검수를 맡았다.
카엘은 그걸 흥미롭게 봤다.
같은 문장이라도 단어 하나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보호.’
‘주둔.’
‘사용.’
‘권리.’
‘특허.’
모두 전쟁터의 창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단어였다.
항구 우선정박권은 25년으로 제한됐다.
관세징수권은 전쟁채무 상환과 연동.
주둔군 규모도 상한 설정.
사힌은 생각보다 많은 걸 깎아냈다.
카엘은 속으로 인정했다.
왕은 전쟁보다 협상에서 더 강했다.
제국 사절도 바보가 아니었다.
무리한 요구는 장기적으로 반발을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양보했다.
그 결과 나온 조약은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합리적인 조약이 한 방향으로만 쌓였다는 것이었다.
제국 상인은 더 안전해졌다.
제국군은 합법적으로 남았다.
제국은 관세 일부를 받았다.
사하르는 독립왕국이었다.
그런데 제국 없이는 전후복구가 점점 어려워졌다.
카엘은 그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이상하다고 느꼈다.
서명 직전 사힌이 카엘에게 낮게 말했다.
“읽어봤습니까?”
“예.”
“어때요?”
카엘은 솔직하게 답했다.
“전쟁보다 낫습니다.”
사힌이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카엘은 문서를 봤다.
“다음 전쟁이 없어도 제국은 계속 여기 있겠군요.”
사힌의 웃음이 사라졌다.
잠시 후 왕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왕국을 빨리 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제국을 몰아내려고요?”
“아니.”
사힌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지려고.”
그 말은 카엘에게 깊이 남았다.
조약이 체결됐다.
인장이 찍혔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전쟁은 정말 끝났다.
그날 저녁 카엘은 마라벤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말.
검.
갑옷.
상자 두 개.
동방에 올 때와 짐은 거의 같았다.
달라진 것은 문서 하나였다.
마라벤 변경령 관리권.
리사라가 숙소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언제 떠나요?”
“이틀 뒤.”
“빠르네요.”
“영지 상태가 엉망이라며.”
“정확히는 엉망보다 조금 아래일 겁니다.”
카엘이 웃었다.
“와본 적 있어?”
“세 번.”
“좋아.”
“뭐가요?”
“같이 가.”
리사라가 눈썹을 올렸다.
“왜요?”
마라벤으로 떠나기 전 카엘은 포상문서의 조건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관리권과 임시 봉토.’
완전한 세습영지가 아니었다.
전후 안정화가 완료되면 재평가.
세입 일부는 사힌 왕실에 납부.
제국 상인의 안전보장 의무.
해안방위 의무.
카엘은 문서 끝까지 읽고 말했다.
“주는 게 많군.”
리사라가 말했다.
“받는 것도 많잖아요.”
“땅이랑 문제.”
“문제가 더 많을걸요.”
마르코는 마라벤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항구가 있다면서요?”
“작은 거.”
“항구는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커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카엘은 경계했다.
“벌써 투자 생각인가?”
“친구가 영지를 받았는데 축하부터 해야죠.”
“우리가 친구였나?”
마르코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자율부터 말씀드릴까요?”
카엘은 웃었다.
에드윈도 동행하겠다고 했다.
“왜요?”
“마라벤에 교회 진료소가 없다더군요.”
“누가 알려줬습니까?”
“교회는 기사님보다 장부가 많습니다.”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혼자 영지로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리사라.
마르코.
에드윈.
각자 이유는 달랐다.
카엘은 그들을 데리고 영지를 만든다는 생각을 아직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사힌을 찾아갔다.
왕은 새 법령에 서명 중이었다.
노예매매 제한령.
카엘이 문서를 봤다.
“정말 하시는군요.”
사힌이 고개를 들었다.
“약속했으니까.”
“귀족들 반발할 텐데요.”
“그래서 단계적으로 합니다.”
카엘이 웃었다.
“전하답습니다.”
“비겁하다는 뜻입니까?”
“살아남으려는 뜻.”
사힌도 웃었다.
둘은 악수했다.
“마라벤을 잘 부탁합니다.”
“전하 땅인데요.”
“그러니까.”
카엘은 그 말을 가볍게 들었다.
훗날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묻는 일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 오후 카엘 일행은 카스린을 떠났다.
왕의 도시가 뒤로 멀어졌다.
앞에는 바다와 습지 사이에 있다는 작은 항구.
마라벤.
카엘은 노크의 목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진짜 시작이군.”
리사라가 옆에서 말했다.
“기사님.”
“왜.”
“영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카엘은 생각했다.
“아직은 하지 마.”
“왜요?”
“어색해.”
리사라가 웃었다.
마라벤으로 가는 길은 왕의 길과 달랐다.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지방길.
진흙.
부서진 다리.
통행세를 받는 작은 관문.
카엘은 첫날부터 세 번 멈췄다.
한 관문에서는 사힌 왕의 문서를 보여줬는데도 돈을 내라고 했다.
“왕실 문장입니다.”
리사라가 말했다.
관문지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바렌 경 땅이라는데요.”
카엘이 말했다.
“사힌 전하가 왕인데.”
“그게 여기까지 바로 오는 건 아니죠.”
리사라가 웃었다.
카엘은 웃지 못했다.
왕이 왕이 되었다고 왕국 모든 곳이 같은 규칙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사힌이 중앙집권을 원하는 이유였다.
동시에 각 지역이 제국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카엘은 통행세를 냈다.
부관이 불만을 표했다.
“왕실 명령인데 왜 냅니까?”
“지금 여기서 싸우는 것보다 싸다.”
말하고 나서 카엘은 멈칫했다.
사힌이나 마르코가 할 법한 말을 자신이 했다.
리사라가 바로 알아차렸다.
“많이 배웠네요.”
“좋은 건가?”
“모르죠.”
마라벤까지 가는 길에는 그런 ‘모르겠다’가 계속 나왔다.
카엘은 예전보다 답을 덜 확신하게 됐다.
이상하게도 판단은 오히려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곧 익숙해질 겁니다.”
카엘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틀 뒤 마라벤에 도착해 주민 수가 장부와 두 배 가까이 다른 걸 확인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정확히 영주 같은 말이었다.
“장부부터 다시 만들자.”
“통역관 필요해.”
“또?”
“지도도.”
“그건 더 비싸요.”
“급료 줄게.”
리사라는 잠시 생각했다.
“얼마나?”
카엘이 액수를 말했다.
리사라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적어요.”
“이제 막 영지 받은 사람한테 너무하는군.”
“이제 막 영지 받은 사람이니까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죠.”
둘은 한참 흥정했다.
결국 카엘이 졌다.
정확히는 리사라가 원하는 급료보다 조금 낮고, 카엘이 처음 제안한 것보다 훨씬 높은 선에서 끝났다.
“내일부터 출근.”
“모레 떠난다면서요.”
“그래서 내일 장부부터 봐야지.”
리사라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영주가 됐네요.”
카엘은 창밖을 봤다.
멀리 카스린 성벽 위에는 새 왕의 깃발이 펄럭였다.
승리.
왕관.
조약.
빚.
그리고 자기에게 떨어진 작은 해안 영지.
카엘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제부터는 명령을 받는 것보다,
자기가 내린 명령의 결과를 책임지는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것.
다음 날 아침,
마라벤에서 첫 장부가 도착했다.
공식 인구.
2,812명.
리사라는 숫자를 보더니 말했다.
“틀렸네요.”
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저기 적어도 오천은 살아요.”
카엘은 장부를 다시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영지의 첫 문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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