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9화 — 왕자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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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힌의 식탁에는 왕관이 없었다.
그 대신 빚이 있었다.
카엘은 그 사실을 식사가 시작된 지 십 분 만에 알았다.
“제국군 육백 명.”
사힌이 포도주잔을 돌리며 말했다.
“벨로르 용병이 라디르에게 약 천 명. 둘 다 공짜는 아니지요.”
카엘은 맞은편에 앉은 왕자를 바라봤다.
사힌의 천막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지도와 전쟁보고서가 식탁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리사라는 왕자 오른편에 앉았다.
“제국은 전쟁 뒤 상환을 요구할 겁니다.”
카엘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인지도?”
“대충.”
사힌이 웃었다.
“정확한 숫자를 말하면 오늘 저녁을 못 먹을 정도로.”
카엘은 웃지 않았다.
“그래도 요청하셨습니다.”
“선택지가 있었으니까요.”
“라디르와 협상하는 것.”
“그리고 왕위를 포기하는 것.”
“그것도 선택입니다.”
리사라가 카엘을 잠깐 봤다.
말이 너무 직선적이었다.
사힌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제가 왕위를 포기하면 북부 귀족들이 이 나라를 나눠 가집니다. 라디르는 좋은 사람이지만 자기 편 귀족을 통제하지 못해요.”
“당신은 통제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왕이 되려는 겁니다.”
카엘은 그 답이 마음에 들었다.
사힌이 손가락으로 지도를 두드렸다.
“제국은 나를 이용하려 합니다.”
카엘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항구를 원하고, 벨로르를 막고 싶고, 상인을 보호하려 하지요.”
“그걸 알고도.”
“나도 제국을 이용하니까.”
사힌이 웃었다.
“당신들 군대로 라디르의 귀족들을 꺾고, 상인들의 돈으로 길을 만들고, 일광교 사제들 도움으로 노예시장을 줄일 겁니다.”
“위험한 생각 아닙니까?”
“어느 쪽에?”
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리사라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전하께서 제국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동안, 제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네가 내 옆에 있어야지.”
사힌이 태연하게 답했다.
카엘은 두 사람이 오래 아는 사이임을 깨달았다.
“사하린 가문은 왕자 편입니까?”
그가 물었다.
식탁에는 사힌의 측근들도 있었다.
남부 귀족 두 명.
항구도시 대표.
왕실군 장교.
그리고 늙은 재무관.
그들끼리도 의견이 달랐다.
남부 귀족은 제국군을 더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구 대표는 반대했다.
“군대가 많아질수록 비용도 커집니다.”
귀족이 코웃음쳤다.
“나라를 되찾고 난 뒤 돈을 걱정하시오.”
늙은 재무관이 말했다.
“나라를 되찾고 돈이 없으면 다시 잃습니다.”
카엘은 그 말을 기억했다.
사힌은 사람들을 억누르지 않았다.
서로 싸우게 두고 필요한 순간에만 끼어들었다.
카엘은 그 방식이 제국 귀족회의와 전혀 달랐지만 효과적이라는 걸 인정했다.
식사 도중 마르코가 가져온 군수계약서가 올라왔다.
사힌은 수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말 사료가 왜 이렇게 비싸졌습니까?”
마르코가 태연하게 답했다.
“전쟁 중이니까요.”
“지난달보다 삼 할입니다.”
“지난달에는 전쟁이 덜했으니까요.”
카엘은 웃음을 참았다.
사힌은 계약서를 내려놨다.
“세란 사람들은 전쟁을 좋아합니까?”
“아닙니다.”
마르코가 말했다.
“전쟁은 채무자가 죽을 수 있어서 위험합니다.”
사힌이 웃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지만 솔직하군.”
카엘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사힌이 제국에 진 빚의 구체적인 일부를 봤다.
병사 급료.
선박 사용료.
무기.
군량.
말.
모든 것에 가격이 있었다.
심지어 제국에서 파견된 기술자들의 급료 일부도 전쟁비용으로 계산됐다.
“우리가 당신들을 돕는다고 배웠는데.”
카엘이 낮게 말하자 사힌이 들었다.
“도움 맞습니다.”
“돈은 받잖습니까.”
“돈 받는 도움은 도움이 아닌가요?”
사힌은 반문했다.
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힌이 웃었다.
“이게 내가 당신들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카엘.”
“제가 뭘 했다고요?”
“당신은 아직 제국이 하는 말과 제국이 하는 일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말은 칭찬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사힌은 리사라에게 현지 상단이 전쟁 후 항구 복구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카엘은 그것도 흥미로웠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사힌은 전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국을 이용한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식사가 끝난 뒤 리사라와 카엘은 천막 밖을 함께 걸었다.
“사힌 전하를 어떻게 봅니까?”
카엘이 물었다.
“왕이 되고 싶은 사람.”
“그건 알겠고.”
“그게 가장 중요한데요.”
“좋은 왕이 될 것 같나?”
리사라는 잠시 생각했다.
“좋은 왕이란 말을 별로 안 믿어요.”
“왜?”
“좋은 사람이 왕이 된다고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카엘은 사힌의 천막을 돌아봤다.
“난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요.”
“그럼?”
“괜찮은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 제일 위험할 때도 있죠.”
카엘은 그 말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느꼈다.
“당신은 사람을 잘 못 믿는군.”
“상인 집안에서 자랐으니까요.”
“계약은 믿고?”
“계약도 안 믿어요. 계약을 어기면 얼마를 잃는지를 믿죠.”
마르코가 들었다면 좋아할 말이었다.
카엘은 미소 지었다.
“당신과 세란은 잘 맞겠군.”
“절대 싫어요.”
“왜?”
“같은 장사꾼끼리가 제일 싫어해요.”
카엘은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전쟁이나 통역이 아닌 이야기를 조금 했다.
리사라는 어릴 때부터 항구와 내륙 장터를 따라다녔다.
카엘은 작은 기사령에서 장부와 검을 같이 배웠다.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랐는데 이상하게도 둘 다 가족의 첫 번째 기대를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카엘은 그 공통점을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아직은 너무 이른 말 같았다.
카엘은 왕자를 조금 더 존중하게 됐다.
동시에 한 가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힌이 이긴 뒤에도 제국이 정말 물러날까?
리사라가 대답했다.
“우리 집은 장사꾼이에요.”
“그게 대답입니까?”
“왕이 누구든 세금은 내야 하니까요.”
사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저 집안을 믿을 수 있어요. 충성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거든.”
식사 후에는 전쟁회의가 이어졌다.
라디르군은 강 북쪽에 진지를 잡고 있었다.
제국 지휘관들은 정면공격을 제안했다.
사힌의 재무관은 식탁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장부를 정리했다.
카엘이 호기심에 물었다.
“전쟁비용을 정말 다 갚을 수 있습니까?”
노인은 깃펜을 멈췄다.
“전쟁에서 이기면요.”
“지면?”
“죽은 사람에게 빚 받으러 오진 않겠죠.”
“나라가 남으면?”
노인은 카엘을 바라봤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는 장부 한쪽을 보여줬다.
전쟁비용의 일부는 현금이 아니라 미래 관세수입을 담보로 잡혀 있었다.
“그러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국 상인이 관세를 가져갑니까?”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카엘은 사힌의 ‘채무자가 살아 있어야 채권자도 돈을 받는다’는 말을 떠올렸다.
논리는 맞았다.
하지만 반대쪽 논리도 있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계속 갚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 차이가 언젠가 중요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힌은 반대했다.
“저들은 우리가 강을 건너길 기다립니다.”
카엘이 물었다.
“그럼 우회로가 있습니까?”
리사라가 지도를 펼쳤다.
“비가 안 오면 여기.”
작은 건천이었다.
카엘은 제국지도를 확인했다.
역시 없었다.
“또 없군.”
그가 중얼거리자 리사라가 웃었다.
사힌이 카엘에게 말했다.
“아르덴 경.”
“예.”
“내일 이 길을 확인해주십시오.”
“정찰입니까?”
“이번엔 진짜 정찰.”
천막 안에서 웃음이 났다.
카엘도 어쩔 수 없이 웃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힌이 그를 따로 불렀다.
“카엘.”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예, 전하.”
“당신들은 내가 제국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카엘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이니까요.”
“맞습니다.”
사힌이 천막 밖의 어둠을 바라봤다.
“그런데 빚을 진 사람이 반드시 약한 건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으려면 채무자가 살아 있어야 하거든.”
그는 미소 지었다.
“내가 왕이 되고 나라가 부유해질수록, 제국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카엘은 꽤 영리한 생각이라고 느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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