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84화 — 세나의 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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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는 기록에 빈칸을 남겼다.
처음에는 실수인 줄 알았다.
“이거 왜 없어.”
“모르니까.”
“추정해서 쓰면.”
“왜.”
“나중에 필요할 수도.”
세나가 나를 봤다.
“모르는 걸 채우는 게 더 위험해.”
내 회고록의 `[모름]` 표기가 아주 먼 훗날 생기지만,
그 생각은 이런 장면에서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공동부담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느 집이 지난 계절 노동을 얼마나 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기억이 갈렸다.
나는 중간값을 적자고 했다.
세나는 빈칸.
“그럼 계산 안 되잖아.”
“안 되는 걸 되는 척하지 마.”
그 말이 아팠다.
나는 평생 모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기억도.
사람도.
정치도.
세나는 모르는 자리를 남겨두는 데 나보다 능했다.
세나의 빈칸 방식은 곧 다른 기록에도 들어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싫어했다.
“왜 비워.”
“몰라서.”
“그럼 조사해.”
“못 하면.”
“대충.”
세나는 절대 대충 채우지 않았다.
한 번은 공동부담 기록에서 집 하나의 수확량이 비어 있었다.
아렘은 이전 해 기준으로 넣자고 했다.
세나는 반대.
나는 아렘 쪽이었다.
“계산해야 하잖아.”
세나가 말했다.
“추정이라고 표시하면 해.”
그 타협이 좋았다.
모름과 추정을 다르게.
훗날 회고록의 `[모름]`과 `[추정]`은 이런 경험이 쌓여 생긴다.
나는 그때 처음 기록 옆에 다른 모양을 붙였다.
확실함.
들은 것.
추정.
비어 있음.
단순한 표식.
놀랍게도 사람들은 금방 익숙해졌다.
“이건 확실한 거야?”
“아니, 저 표시 있잖아.”
기록이 사실을 담는 것뿐 아니라 확신 정도도 담을 수 있다는 생각.
내게는 큰 변화였다.
내 기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개인 기록을 꺼냈다.
네라.
사무.
이라.
부모.
몇 문장 옆에 새 표식을 붙였다.
확실.
추정.
모름.
손이 잘 안 움직였다.
어머니 마지막 말.
모름.
아버지 마지막 말.
모름.
사무가 강에 빠졌는지 이라였는지.
모름.
그 표시를 붙이는 순간 뭔가를 포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세나가 옆에서 봤다.
“왜.”
“모른다고 쓰면 영원히 모르는 것 같아서.”
“이미 모르잖아.”
냉정했다.
맞았다.
“나중에 기억날 수도.”
“그러면 바꿔.”
단순했다.
기록은 판결이 아니라 현재 상태.
그 생각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나는 네라 이름 옆에도 작은 표시를 붙였다.
[추정]
세나가 물었다.
“그 이름도?”
“정확한 소리인지 몰라.”
“그럼 지금 부르는 건.”
“가장 가까운 거.”
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네.”
같은 말을 두 번째 들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네라의 정확한 이름을 영원히 잃었을 가능성을 조금 받아들였다.
기억이 흐려져도 관계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빈칸이 있다고 삶 전체가 빈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 기록에서도 비슷했다.
모르는 걸 비워두자 오히려 거짓 확신이 줄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답답해했지만,
나중에는 빈칸을 보면 질문했다.
그 질문이 새로운 확인을 만들기도 했다.
세나의 빈칸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아니었다.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 적힌 자리였다.
빈칸 표시가 생긴 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기억을 더 조심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해?”
누군가 묻으면,
예전에는 바로 “응”이라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마.”
“들은 얘기.”
“직접 봤어.”
구분했다.
작은 문화 변화였다.
판단 자리에서도 효과가 컸다.
증인이 말할 때 직접 본 것인지,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먼저 물었다.
63화 피값 사건 같은 오판 위험이 조금 줄었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사람은 직접 본 것도 틀린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래된 물길 붕괴 사건을 두 노인이 다르게 기억했다.
둘 다 직접 봤다고 했다.
한 사람은 밤.
한 사람은 낮.
나는 둘 중 하나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다.
테멘이 말했다.
“두 번 무너졌을 수도.”
정말 기록을 찾아보니 비슷한 사고가 두 번 있었다.
나는 웃었다.
사람 기억 충돌이 항상 한쪽 오류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 뒤 기록에는 사건을 너무 빨리 하나로 합치지 않으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 둘.
같은 사건인지 모르면 따로.
이 습관이 훗날 역사 기록을 볼 때 큰 도움이 됐다.
왕 이름이 같다고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전쟁 두 기록이 같은 전투인지,
다른 전투인지.
나는 내 삶 때문에 기록을 의심했고,
기록 때문에 내 기억도 의심했다.
세나는 말했다.
“좋아졌네.”
“뭐가.”
“예전보다 덜 우겨.”
“내가 언제.”
세나가 나를 봤다.
“지금.”
나는 웃었다.
빈칸은 기록에만 생긴 것이 아니었다.
내 성격에도 조금 여백이 생기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래 기록을 정리했다.
사람들은 다 돌아갔다.
아렘도.
테멘은 기침 때문에 일찍 갔다.
둘만 남았다.
세나는 손을 털었다.
“끝.”
“아직 이것도.”
“내일.”
“금방인데.”
“내일.”
나는 웃었다.
네라 같지 않았다.
네라는 ‘지금 살라’고 했고,
세나는 ‘내일 해도 된다’고 했다.
둘 다 나를 멈추게 하는 방식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밤이 깊었다.
세나가 물었다.
“당신 진짜 잠은 자?”
“자.”
“얼마나.”
“보통 사람처럼.”
“보통 사람이 몇 시간인데.”
나는 웃었다.
“왜 조사해.”
“항상 먼저 와 있잖아.”
나는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잠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회복이 빠를 때가 많았다.
세나는 내 몸의 이상함을 조금씩 보고 있었다.
상처.
얼굴.
나이 질문.
나는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생각했다.
“세나.”
“왜.”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도.”
그녀가 바로 말했다.
“이미 알아.”
나는 멈췄다.
“무슨 뜻.”
“성격.”
나는 화냈다.
세나는 웃었다.
그날 더 말하지 못했다.
◆빈칸 표시는 예상보다 빨리 정치적인 문제도 만들었다.
어느 분쟁에서 한 사람의 출신지가 기록에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말했다.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믿어?”
나는 기분이 나빴다.
출신을 모른다는 이유가 신뢰하지 못할 근거가 되는가.
세나는 바로 말했다.
“빈칸은 의심 표시가 아니야.”
그 말이 중요했다.
사람들은 빈칸을 ‘나쁜 정보’로 읽기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록 설명에 한 줄을 더 붙였다.
모름은 불리함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단순한 원칙.
당시에는 필요했다.
피난민이나 외지인은 원래 정보가 적었다.
오래 산 집은 기록이 많았다.
정보량 차이가 권리 차이로 바뀌면 새 사람은 늘 불리하다.
나는 그걸 보고 조금 놀랐다.
기록을 공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기록이 많은 사람에게 더 유리한 구조가 될 수도 있었다.
세나는 말했다.
“그래서 기록 못 믿는 사람 말도 들어야 해.”
“기록 만들자고 한 건 당신이잖아.”
“도구라고 했지 신이라고 안 했어.”
또 맞는 말.
그 뒤 판단 자리에서는 문서가 있어도 사람 말을 따로 들었다.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지 않게.
반대로 기록이 있다고 무조건 이기지 않게.
이 균형은 어려웠다.
하지만 필요했다.
나는 기록을 좋아했고,
그래서 더 경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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