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58화 — 장소에 붙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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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지에도 원래 이름은 있었다.
지금 내가 그 소리를 정확히 복원할 수는 없다.
강의 모양에서 나온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근처 식물.
오래전 살았다는 사람.
[모름]
문제는 외지인들이 그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는 것이다.
말이 다르니 당연했다.
어느 상인은 물길이 많은 곳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은 벽 있는 곳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아렘의 시장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무리가 내 이름 비슷한 소리를 붙여 말했다.
“어디서 왔어?”
“그쪽.”
그들이 정착지를 가리키며 내가 쓰는 이름 + 장소를 뜻하는 말을 붙였다.
나는 바로 인상을 썼다.
“왜 내 이름을 붙여.”
통역하던 사람이 웃었다.
“저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
“하지 말라고 해.”
그는 전달했다.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달 다른 무리가 또 그렇게 불렀다.
소문은 생각보다 고치기 어렵다.
특히 편한 이름이면.
테멘은 재미있어했다.
“당신 마을이네.”
“내 마을 아니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던데.”
“여기 있던 사람들이 훨씬 오래 살았어.”
“그 사람 이름은 외지인이 모르잖아.”
그 말이 싫었다.
역사는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아주 작은 규모에서 봤다.
누가 먼저 있었는지가 아니라,
누구 이름이 밖으로 퍼졌는지가 중요해질 때가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기존 이름을 거래 때 더 자주 썼다.
“여기 이름은 이거야.”
외지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내 이름 쪽이 쉬웠다.
몇 명은 그냥 자기 방식대로 불렀다.
아렘은 말했다.
“장사엔 쉬운 이름이 좋아.”
“그래서 내 이름 붙여?”
“내 이름 붙이면 더 좋아.”
“그럼 당신 걸 써.”
그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사람들이 안 써.”
나는 웃었다.
장난처럼 넘어갔지만 불편함은 남았다.
장소에 내 이름이 붙는다는 건,
내가 사라진 뒤에도 소리가 남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좋았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안다는 것.
내가 만든 물길과 벽을 이야기한다는 것.
내가 없는 곳에서도.
그 감각은 달콤했다.
네라가 있었다면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잘난 척하네.’
나는 그 목소리를 상상하고 혼자 웃었다.
이름 문제는 거래에서 실제 문제가 됐다.
외지 상인 한 명이 잘못된 이름을 듣고 다른 정착지로 갔다.
하루를 돌아왔다.
그는 화가 났다.
“너희 이름 왜 이렇게 많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렘은 그걸 기회로 봤다.
“하나 정하자.”
“누가.”
“사람들이.”
테멘은 관심 없었다.
“이름이 밥 주냐.”
아렘은 말했다.
“길 잃으면 밥 못 와.”
맞았다.
사람들이 모였다.
기존 이름을 쓰자는 사람.
외지인이 부르는 쉬운 이름을 쓰자는 사람.
내 이름이 들어간 말을 쓰자는 사람.
나는 마지막을 바로 반대했다.
“안 돼.”
“왜.”
“왜 내 이름이야.”
누군가 말했다.
“외지인이 이미 그렇게 알아.”
“그럼 고쳐.”
“귀찮아.”
아렘이 웃었다.
나는 화가 났다.
결국 공식적으로 뭔가를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내부에서는 기존 이름을 썼다.
외부 거래에서는 쉬운 별칭도 허용했다.
둘이 같이 살았다.
나는 그 어중간한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
하나로 통일하지 않아도 됐다.
장소 이름을 둘러싼 일은 생각보다 감정적이었다.
기존 이름을 고집하는 노인들은 말했다.
“우리 부모도 그렇게 불렀어.”
젊은 상인들은 말했다.
“밖에서 못 알아들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둘 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고향 이름.
길 위 새 이름.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어느 것이 진짜인가.
다 진짜일 수 있었다.
아렘은 거래용 표식까지 만들자고 했다.
곡물 자루나 물건에 이곳에서 왔다는 표시.
“왜.”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알아보게.”
“좋은 물건이면 알아서 사잖아.”
“좋은 걸 어떻게 알아.”
그는 시장을 가리켰다.
“전에 산 곳이면 믿지.”
나는 흥미가 생겼다.
장소 이름이 신뢰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나쁜 물건 하나가 전체 이름을 망칠 수도 있었다.
아렘은 몇 상인에게 같은 표식을 쓰자고 했다.
누군가는 좋아했다.
누군가는 싫어했다.
“내 물건이 더 좋아.”
“왜 같은 표시 써.”
또 시작이었다.
결국 일정 기준을 맞춘 물건만 공동 표식을 쓰게 했다.
누가 기준을 정할지.
또 문제.
나는 일부러 빠지려 했다.
“상인들이 정해.”
아렘이 말했다.
“당신도 봐.”
“왜.”
“사람들이 당신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잖아.”
그 말이 불편했다.
동시에 기분 좋았다.
나는 결국 회의에 앉았다.
기준을 정하는 데 참여했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순간도 중요했다.
내 이름이 장소와 물건의 신뢰에 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직 나를 군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평판이 공동체의 평판과 섞이고 있었다.
그날 밤 혼자 기록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름을 붙이는 게 싫다고 하면서,
왜 기준을 정하는 자리에는 앉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내 이름이 나쁘게 쓰이는 건 싫었고,
좋게 쓰이는 건 싫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허영이 있었다.
그걸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날 밤 벽에 아이들이 긁어놓은 여러 이름을 봤다.
내 이름 옆에 테멘.
아렘.
자기들 이름.
나는 손으로 만졌다.
흙벽이라 오래 남지 않을 것이다.
비가 오면 흐려질 수도 있었다.
그게 좋았다.
이름은 영원하지 않아도 됐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내 이름이 조금 더 선명하게 새겨진 부분을 오래 본 것은 사실이다.
그날 저녁 아이 하나가 벽에 내 이름 비슷한 표식을 긁었다.
“뭐 해.”
“이름.”
“왜.”
“여기 당신 있잖아.”
“테멘도 있어.”
아이가 테멘 이름도 옆에 긁었다.
테멘은 싫어했다.
“지워.”
나는 웃었다.
“왜.”
“내 이름 벽에 왜 써.”
그 순간 입장이 바뀌었다.
나는 더 웃었다.
아이들은 아렘 이름도,
경비 책임자 이름도,
자기 이름도 벽에 적었다.
결국 벽 한쪽이 엉망이 됐다.
누군가 지우려고 했다.
나는 말렸다.
“놔둬.”
왜냐고 물었다.
“그냥.”
여러 이름이 같이 있는 편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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