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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제국
001 / 130LONG-FORM EDITION

ORIGINAL FICTION

제29화 — 이라의 약속

세상이 이름을 갖기 전에 · 29 / 370약 8분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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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가 나를 찾아왔다.

혼자였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네라는 잠들어 있었다.

이라는 바깥에 앉았다.

“사무 오빠랑 싸웠다며.”

“싸운 건 아니야.”

“오빠는 싸웠다고 하던데.”

“그럼 싸운 거겠지.”

이라는 웃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떠날 거야?”

나는 이제 숨기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 뒤에?”

“아마.”

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놀랐다.

“좋다고?”

“여기 계속 있으면 더 힘들 거야.”

“너는?”

“나도 힘들지.”

이라는 손을 모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내 아이들이 늙고, 또 그 아이들이 늙는 것도 볼 거잖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거 싫어.”

“왜.”

“아버지한테 그런 거 보여주기 싫어.”

나는 그녀를 봤다.

이라는 네라를 닮았다.

현실적인 말을 하는 방식까지.

“그래서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나중에 떠나면.”

이라는 잠시 말을 골랐다.

“우리 후손 찾으러 다니지 마.”

그 부탁은 예상하지 못했다.

“왜.”

“아버지는 계속 살아 있잖아.”

“모르지.”

이라가 나를 노려봤다.

“지금 그 말 하지 마.”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 산다고 치면.”

이라는 말했다.

“내 아이의 아이의 아이까지 찾아가서 내가 네 조상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어떡해.”

나는 생각했다.

“좋아할 수도 있지.”

“싫어할 수도 있지.”

맞았다.

“그냥 살게 둬.”

이라는 말했다.

“우리가 아버지 자식이라는 건 우리 일이고, 나중 사람들 일은 아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진짜?”

“응.”

이라가 웃었다.

“아버지는 약속은 잘 지키니까.”

나는 네라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대부분.”

이라는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한 번 안았다.

“아버지.”

“왜.”

“나중에 나 잊어도 돼.”

나는 바로 말했다.

“안 잊어.”

이라가 미소 지었다.

“그것도 거짓말.”

나는 화를 내려 했다.

이라는 먼저 말했다.

“사람 다 잊어. 아버지는 더 오래 살면 더 많이 잊겠지.”

“이라.”

“그냥.”

그녀는 길 쪽으로 걸었다.

“기억나는 만큼만 기억해.”

나는 그 말을 오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라의 부탁은 나에게 예상보다 오래 남았다.

후손을 찾지 말 것.

그 말은 단순히 멀리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가족’이라는 권리를 어느 시점에서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그게 어려웠다.

이라가 말했다.

“아버지는 계속 가족일 거라고 생각하지.”

“당연하지.”

“몇 세대까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손녀?”

“가족이지.”

“그 손녀의 손녀?”

나는 멈췄다.

이라는 웃었다.

“거봐.”

“그래도 내 피 있잖아.”

“피 조금 있다고 가족이면 세상에 가족 엄청 많겠네.”

이라다운 말이었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너는 왜 그렇게 잘 끊어.”

“끊는 게 아니라 놓는 거지.”

“뭐가 달라.”

“끊는 건 싫어서 하는 거고, 놓는 건 살라고 하는 거.”

나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오래 걸렸다.

아마 지금도 완전히는 아닐 것이다.

이라가 말했다.

“내 아이들은 내가 볼게.”

“알아.”

“그다음은 그 애들이 보고.”

“응.”

“아버지는 자기 삶 살아.”

그 말이 이상했다.

나는 내 삶이 뭔지 아직 몰랐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내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족이 없어지면 그 다음이 ‘내 삶’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라가 돌아간 뒤 나는 한참 그 길을 봤다.

기억나는 만큼만 기억해.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네라의 얼굴.

사무 목소리.

이라 손.

아이들의 이름.

마을 길.

부모 무덤.

강 냄새.

다.

그날 밤 일부러 기억을 시험했다.

어머니 목소리.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젊을 때 웃는 얼굴.

흐렸다.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 중 한 명의 이름.

없었다.

공포가 올라왔다.

나는 네라를 깨웠다.

“왜.”

“당신 목소리 기억해.”

네라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 듣고 있잖아.”

“아니, 나중에.”

“또 나 죽였네.”

“진지해.”

네라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지금 내 목소리 들으면 돼.”

“나중에 잊으면.”

“그때 가서 잊어.”

그 말이 너무 답답했다.

나는 계속 물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내 어릴 때 이야기 말해줘.”

“지금?”

“응.”

네라는 졸린 목소리로 몇 가지 말했다.

물고기.

비뚤어진 벽.

잃어버린 칼집.

사무 태어난 날.

나는 들으면서 외우려고 했다.

네라가 중간에 잠들었다.

나는 한동안 깨어 있었다.

기억을 붙잡는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라의 말을 듣고 나는 실제로 이름들을 적어보려 했다.

내가 잊고 싶지 않은 사람들.

부모.

네라.

사무.

이라.

친구들.

이웃.

그런데 첫 줄부터 막혔다.

부모 이름을 정확히 적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소리가 정말 맞는지.

어떤 친구는 얼굴은 있는데 이름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은 있는데 얼굴이 없었다.

나는 화가 나 기록을 덮었다.

네라가 물었다.

“왜.”

“못 쓰겠어.”

“뭘.”

설명했다.

네라가 말했다.

“틀리면 틀린 대로 써.”

“그럼 기록이 아니잖아.”

“당신 기억 기록하는 거잖아.”

“진짜를 남겨야지.”

네라가 나를 봤다.

“당신이 아는 진짜가 그거면 어떡해.”

그 말은 훗날 내 회고록의 방식이 됐다.

[기억]

[기록]

[추정]

[모름]

그 구분은 수천 년 뒤 생겼지만,

씨앗은 이런 대화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기억을 적으려다 실패한 뒤 나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사람마다 물건 하나를 연결했다.

어머니—바구니.

아버지—지팡이와 칼.

네라—푸른 펜던트.

사무—도구.

이라—바구니와 손.

물건을 보면 사람이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효과가 있었다.

동시에 위험했다.

물건을 잃으면 기억도 같이 흔들렸다.

아버지 칼이 정말 그 칼인지 의심하면서 아버지 젊은 시절 기억까지 의심하게 됐다.

네라는 말했다.

“사람을 물건에 묶지 마.”

“당신이 펜던트 줬잖아.”

“내가 나 대신 준 건 아니야.”

그 말이 정확했다.

펜던트는 네라가 아니었다.

그냥 네라가 만진 물건.

그래도 사람은 작은 표식을 필요로 한다.

나는 완전히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놓지 않았다.

기억은 너무 쉽게 흐려졌다.

그날 이후 나는 기록을 남길 때 확신의 정도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아주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확실한 것.

들은 것.

추정한 것.

모르는 것.

지금 회고록의 표기 방식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은 비슷했다.

나는 기억과 사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네라가 내 표시를 보고 말했다.

“이건 뭐야.”

설명했다.

그녀는 웃었다.

“모른다는 표시가 제일 많네.”

“그러게.”

“좋네.”

“뭐가.”

“이제 좀 사람 같아.”

나는 화낸 척했다.

네라는 웃었다.

모른다는 표시가 늘어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편해졌다.

전부 기억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조금 벗어났다.

잊는 것을 실패가 아니라 상태로 기록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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