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FICTION
제41화 — 다음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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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001의 두 번째 주문이 들어온 주, 대니얼은 축하 대신 새 회의를 잡았다.
회의 제목은 짧았다.
Accelerator.
이선이 제목을 보고 말했다.
“드디어 왔네.”
“뭐가요?”
“네가 참던 거.”
대니얼은 모른 척했다.
화이트보드에는 지난 몇 달 동안 연구팀이 얻은 결과가 정리돼 있었다.
특정 수치연산.
기존 CPU 대비 최고 4.7배.
전체 작업은 평균 18퍼센트 개선.
연구용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제품으로는 애매했다.
대니얼은 두 번째 숫자보다 첫 번째 숫자를 오래 봤다.
“전용화하면 더 올라갑니다.”
연구원이 말했다.
“그래픽 연산장치 그대로 쓰는 것보다?”
“특정 작업에는요.”
“얼마나?”
“모릅니다.”
“추정은?”
연구원은 범위를 말했다.
대니얼의 눈빛이 달라졌다.
첫 삶의 기억이 맞다면, 연산은 앞으로 모든 산업의 병목이 된다.
AI.
시뮬레이션.
설계.
재료.
신약.
우주.
더 싸고 빠른 계산은 기술 전체를 앞당긴다.
그에게는 너무 명백했다.
“개발합시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팀장이 물었다.
“연구를요?”
“제품까지.”
이선이 바로 끼어들었다.
“잠깐.”
대니얼은 예상했다는 듯 돌아봤다.
“왜요?”
“고객이 달라고 했어?”
“아직은요.”
“시장조사?”
“해야죠.”
“그다음 제품결정 아닌가?”
대니얼은 펜을 내려놓았다.
“제품결정은 지금 해야 합니다.”
“왜?”
“리드타임 때문에.”
하드웨어 설계.
보드.
드라이버.
컴파일러.
검증.
생산.
모두 시간이 걸린다.
고객이 요구한 뒤 시작하면 늦는다.
이선은 이해했다.
그래서 더 천천히 물었다.
“늦으면 무슨 일이 생겨?”
대니얼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2046년이 가까워진다.’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경쟁사가 먼저 갑니다.”
“누구?”
대니얼은 특정 회사를 말하지 않았다.
지금 시장에는 범용 그래픽 연산장치를 과학계산에 쓰려는 시도가 이미 있었다.
하지만 Helioxen이 생각하는 수준의 통합제품은 아직 흔하지 않았다.
“곧 나옵니다.”
이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곧’은 어디서 나온 거야?”
대니얼은 입을 다물었다.
미래기억.
C등급.
방향은 강하게 기억하지만 시점은 불확실.
자기 규칙대로라면 근거가 약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건 시장가격을 맞히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방향은 맞다.
시점이 조금 틀려도 언젠가는 쓸 수 있다.
그 논리가 위험하다는 걸 대니얼 자신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연구와 제품개발을 병행합니다.”
팀장이 말했다.
“예산은요?”
대니얼이 숫자를 제시했다.
표정들이 굳었다.
H-001로 번 돈으로는 부족했다.
금융위기에서 확보한 개인자본을 넣어야 했다.
이선이 말했다.
“회사 매출보다 몇 배를 연구제품 하나에 넣겠다고?”
“제 돈으로.”
“그게 면죄부냐?”
대니얼의 얼굴이 굳었다.
“누구 돈도 위험하게 안 합니다.”
“회사 사람 시간은?”
말이 멈췄다.
이선이 손가락으로 팀을 가리켰다.
“돈만 네 거고, 개발자 시간은 회사 거야.”
정확했다.
대니얼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팀장이 말했다.
“일단 고객 인터뷰부터 합시다.”
“몇 곳?”
“최소 열 곳.”
“많네요.”
“제품 만드는데 열 곳이 많습니까?”
대니얼이 헛웃음을 쳤다.
“좋습니다.”
그들은 기존 고객과 연구기관, 제조업체, 해석회사, 대학 연구실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질문은 단순했다.
현재 계산에서 가장 느린 부분은 무엇인가.
몇 배 빨라지면 돈을 낼 것인가.
새 하드웨어 도입을 위해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며칠 뒤 첫 인터뷰.
“두 배 빨라지면요?”
“좋죠.”
“다섯 배는요?”
“더 좋고.”
대니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새 시스템 구매 의향은?”
고객이 되물었다.
“우리 소프트웨어 그대로 돌아가요?”
“일부 수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작업마다 다릅니다.”
“그러면 싫습니다.”
대니얼이 멈췄다.
두 번째 고객.
“성능은 좋은데 우리 코드 누가 옮깁니까?”
세 번째.
“연구원들이 새 환경 배우는 데 몇 달 걸려요.”
네 번째.
“지원은 누가 하죠?”
다섯 번째.
“우린 계산비보다 사람 인건비가 더 비쌉니다.”
여섯 번째.
“현재 장비도 다 못 쓰고 있어요.”
일곱 번째.
“다음 예산주기에 검토하죠.”
여덟 번째.
“가격이 얼마나 싸면 생각해볼 수는 있습니다.”
시장조사 마지막 날, 대니얼은 첫 고객 사장에게 따로 전화를 걸었다.
“하나만 솔직하게 묻겠습니다.”
“뭔데.”
“지금보다 계산이 열 배 빨라집니다.”
“좋지.”
“대신 새 장비를 사고, 일부 코드 바꾸고, 직원 교육해야 합니다.”
침묵.
“얼마나 비싸?”
대니얼이 대략적인 숫자를 말했다.
사장이 휘파람을 불었다.
“안 사.”
“왜요?”
“우리 회사 문제 중 계산이 차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
대니얼은 메모했다.
“그럼 가격이 절반이면?”
“아직 고민.”
“성능이 스무 배면?”
“그쯤 되면 얘기해볼 수 있겠네.”
“그러면 결국 성능 문제 아닙니까?”
사장이 웃었다.
“아니. 변화할 이유가 충분하냐는 문제지.”
대니얼은 그 말을 되물었다.
“변화할 이유?”
“지금 것도 느리지만 돌아가. 새거 도입하면 사람들이 배워야 하고, 문제 생기면 책임져야 하고, 일주일은 뒤죽박죽 되겠지.”
사장은 잠깐 쉬었다.
“열 배가 그 귀찮음을 이길 정도면 사는 거고.”
전화가 끝났다.
대니얼은 한동안 메모를 봤다.
성능은 절대값이 아니었다.
변화의 비용을 이길 만큼 커야 하는 값.
그 생각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더 A1 쪽으로 끌었다.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만들면 된다.
두 배가 아니라 열 배.
열 배가 아니라 스무 배.
고객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선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바로 그 생각이 위험한 거야.”
“왜요?”
“고객이 안 바뀌겠다고 했는데 넌 ‘더 세게 만들면 바뀐다’고 듣잖아.”
대니얼은 짜증이 났다.
“기술혁신이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가끔은.”
“그럼.”
“가끔은 고객이 맞고 제품이 틀린 거지.”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머릿속에는 이미 미래의 데이터센터와 가속연산이 너무 선명했다.
그 선명함이 오히려 현재를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홉 번째.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로 해주면 안 됩니까?”
대니얼의 펜이 멈췄다.
“서비스?”
“장비 사지 않고 계산만 보내면요.”
“보안은?”
“그게 문제죠.”
열 번째 인터뷰가 끝났을 때 화이트보드에는 대니얼이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가득했다.
소프트웨어 전환.
교육.
지원.
조달.
보안.
예산주기.
기존 자산.
이선이 물었다.
“결론?”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이 대신 말했다.
“지금 제품으로는 시장이 작습니다.”
“없지는 않습니다.”
대니얼이 말했다.
“없지는 않죠.”
“그러면.”
“대표님.”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없지는 않다’로 하드웨어 제품 만들면 안 됩니다.”
대니얼의 표정이 굳었다.
“기술은 옵니다.”
“그건 저도 믿습니다.”
“그럼 지금 해야죠.”
“왜요?”
대니얼은 같은 질문을 또 받았다.
왜 지금.
이번에는 대답을 준비했다.
“하드웨어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드라이버, 컴파일러, 운영경험, 고객 워크로드. 이건 몇 년 쌓아야 합니다.”
팀은 조용해졌다.
그 논리는 합리적이었다.
대니얼이 계속했다.
“시장 준비된 뒤 시작하면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 작은 시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선이 물었다.
“제품을 팔려고 만드는 거야, 배우려고 만드는 거야?”
대니얼은 멈췄다.
“둘 다.”
“그게 문제일 수 있어.”
대니얼은 화이트보드를 봤다.
열 명 중 아무도 당장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방향은 안다.
가속기는 온다.
분명히.
“합니다.”
결국 대니얼이 말했다.
회의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대신.”
그가 덧붙였다.
“예산 상한. 인원 상한. 6개월 뒤 판매의향 다시 확인. 안 나오면 중단.”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도 그때 중단할 겁니까?”
대니얼은 몇 초 늦게 대답했다.
“네.”
그 대답이 너무 늦었다는 걸 이선은 알아챘다.
회의가 끝난 뒤 둘만 남았다.
이선이 말했다.
“너 지금 데이터보다 기억 믿지?”
대니얼의 심장이 순간 멎는 것 같았다.
“무슨 기억이요?”
“네 머릿속 미래.”
이선은 진짜 의미를 몰랐다.
“항상 다음에 뭐가 올지 너무 확신하잖아.”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선이 문을 열며 말했다.
“방향 맞는 거하고 지금 제품 맞는 건 다르다.”
문이 닫혔다.
대니얼은 혼자 남았다.
화이트보드의 마지막 줄.
10 interviews
0 immediate purchase commitments
그 아래에 펜을 댔다.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적었다.
Build anyway.
그 순간에는 그 결정이 용기라고 생각했다.
읽은 화로 기록했습니다. 다음 화는 바로 이어집니다.